“18∼19세기는 오케스트라, 20세기는 밴드, 21세기는 미디와 컴퓨터.”
바야흐로 컴퓨터음악의 세기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컴퓨터 음악은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다. TV 미니시리즈에서 연인들이 이별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때, 배경에 흐르는 아련한 선율도 대부분 60인조 오케스트라의 음향이 아니라 펜티엄급 PC에서 합성된 것.
TV쇼의 배경을 화려하게 수놓는 밴드의 연주도 디지털 합성음이 대부분이다. 공연장에서도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창작 연주되는 컴퓨터음악이 각광을 받고 있다. 대학 커리큘럼에서도 컴퓨터음악의 도입은 움직일 수 없는 추세다. 98년 한양대 음대가 학부 전과정에 컴퓨터음악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비롯, 컴퓨터음악은 각 대학에서 필수과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 전자악기의 의사소통= 본격적 컴퓨터음악의 출발은 83년 미디(Midi)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됐다. 50년대 이후 신시사이저(Synthesizer·음향합성기) 등 전자악기가 발전해 왔지만 부분적으로 컴퓨터의 제어를 받았을 뿐 ‘필수적’ 요소는 아니었다. 미디는 컴퓨터와 전자악기간의 정보소통 체계를 통일하는 한편 여러 전자악기간의 합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로소 컴퓨터라는 ‘두뇌’ 아래 다양한 전자음악 요소들이 합쳐질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작곡 연주 합성 변조 등 다양한 기능에 컴퓨터가 쓰이는 만큼 ‘컴퓨터음악’ 이라는 용어를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컴퓨터로 음향을 합성 발생시키는 단순한 ‘전자악기’의 기능이 있는가 하면, 컴퓨터가 악보 작성을 도와주는 작곡 소프트웨어로서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나아가 컴퓨터 스스로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곡가’ 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의 ‘통일 제국’에서는 이 모든 영역이 서로 침투된다. 작곡가가 선율을 만들면 컴퓨터가 반주부를 붙여주고, 작곡가가 이를 들어본 뒤 다시 수정할 수도 있다. 60년대 아날로그 FM(주파수변조) 방식으로 전자음을 만들던 시대에 비하면 혼자 힘으로 엄청난 양의 음향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 센서기술의 발전= 컴퓨터음악의 다양한 발전 양상 중에서도 최근에는 특히 센서기술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최근까지 컴퓨터음악에는 ‘머리’와 ‘목청’만 있었다. 소프트웨어나 키보드로 필요한 음을 입력하고, 이를 다양한 음색으로 표현해 출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센서 기술의 발전은 컴퓨터음악에 귀 눈 등 감각기관을 부여했다.
이는 대중음악에서 사용하기 편리한데다 기존의 악기조작법에 가까운 다양한 ‘전자악기’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키보드를 이용한 연주로는 여러 악기의 독특한 ‘억양’과 ‘숨결’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개발된 ‘전자 목관악기’는 숨을 불어넣는 강약, 취구(吹口)를 무는 정도 등에 따라 다양한 음색을 표현할 수 있다. 전자 타악기의 경우도 마찬가지. 두드리는 부위와 세기에 따라 키보드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센서의 응용은 실험적 음악가들에게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손 등 신체일부에 부착된 센서의 작용에 따라 손을 내리면 낮은 음이, 앞으로 뻗으면 강한 음이 나오는 등 기존 악기연주를 단순한 몸짓으로 대치할 수 있게 됐다. 그림이나 사진 같은 영상정보를 다양한 음향으로 표현 할 수도 있다. 센서에 의해 입력된 신호는 컴퓨터에 의해 변환돼 영상신호나 무대이동 등 다양한 ‘동시효과’를 거둘 수 있다.
▽ 컴퓨터 작곡= 컴퓨터가 처음 선을 보였을 당시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연주 보다는 ‘자동 작곡기계’를 상상했다. 오늘날 컴퓨터를 이용한 작곡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음악 예술을 혼이 없는 기계적 과정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동 작곡 소프트웨어는 이미 실용화 단계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기본적 모티브(動機)나 조건을 인간이 입력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일부 작곡가들은 오히려 “컴퓨터 자동작곡은 진정한 창작과 기계적 반복작업을 구분해 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미래에는 상품 매장의 배경음악 같은 단순하고 편안한 음악창작에는 자동작곡의 도움을 받는 한편, 진정한 예술성이 요구되는 작곡의 경우는 여전히 인간 작곡가의 역할이 중요하리라는 것이다.
▼ 미디(Midi)란 ▼
‘미디’라는 용어를 들으면 ‘컴퓨터로 음을 발생시키는 기계’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미디(Midi·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는 컴퓨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미디란 컴퓨터 또는 전자악기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기 위한 통일된 규약, 즉 ‘국제 표준 인터페이스 시스템’을 뜻한다.
미디가 정해지기 이전까지의 전자악기는 회사마다 다른 체계와 신호에 따라 동작, ‘상호소통성’과 ‘호환성’이 없었다. 그러나 83년 세계의 여러 전자악기 제조사가 미국 새너제이에서 미디 제정에 최종합의함에 따라 전세계에서 생산된 컴퓨터와 전자악기, 센서들은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고 단일한 규칙에 따라 동작할 수 있게 됐다.
여러 대의 전자악기가 미디 케이블로 연결돼 있을 경우 한 대를 연주하면서 컴퓨터에 신호를 보내 여러 대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다. 이전에는 전자음향으로 오케스트라를 표현하려면 테이프를 이용한 편집을 통해서나 가능했지만 미디 탄생 이후엔 실시간(Real Time)으로 이러한 조작이 가능하게 된 것. 미디의 탄생에 따라 컴퓨터는 비로소 전자음악의 주역 으로 등장하게 됐다. 미디 신호를 컴퓨터가 분석한 뒤 재해석, 여러 악기에 보낼 경우 컴퓨터는 전자 악기들의 총감독이자 지휘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디가 무형의 ‘법규’인 반면, 흔히 ‘미디’라는 이름으로 오해되는 장비가 ‘미디 인터페이스’다. 미디 인터페이스는 컴퓨터에 장착돼 컴퓨터와 악기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컴퓨터가 신호를 미디 인터페이스에 내려보내면 미디 인터페이스는 ‘미디’라는 규칙에 따라 정렬된 신호를 전자 악기에 보내고, 악기는 비로소 소리를 낼 수 있다.
미디 기술은 단지 음악에서만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 다양한 기기를 시간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기능 때문에, 90년대 이후 ‘놀이공원’등 거대 시설의 기계 통제나 각종 이벤트 진행, 항만 시설 관리 등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황성호 교수 ▼
“컴퓨터 음악의 매력은 작곡에서 연주까지 책임지는 ‘완결성’에 있습니다. 무대에서 공연을 총지휘할 수 있죠. 기존의 작곡가는 악보만 만들어놓고 정작 발표 때는 멀찌감치 객석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황성호 교수(45). 그는 한국 컴퓨터 음악의 ‘1세대’이자 대표자로 통한다. 현대 음악을 다루는 ‘교수님’으로서는 드물게 그의 음악은 일반 대중에게도 낯익은 편. 케이블TV인 YTN에서 매시간 뉴스가 시작될 때 들리는 활기찬 음악이 그의 작품이다. ‘베스트극장’ 시트콤 ‘김가이가’ 등 드라마의 극 중 효과음악에서도 자주 솜씨를 선보인다.
그가 컴퓨터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76년 서울대 작곡과 재학 시절. 연주가들이 작곡가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던 중 학교에 도입된 전자 음향합성 악기인 신시사이저를 처음 연주해 보면서 “이거라면, 내 의도에 따라 제대로 음악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0년 그는 일본의 한 악기회사 초청으로 두 달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전자음악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회사로서는 자기네 제품을 많이 써달라는 의도였죠. 어쨌던 별천지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악기와는 비교되지 않는 아날로그 방식의 신시사이저였지만, 새롭게 전자음악에 대한 눈을 뜨게 됐습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전자음악연구회를 결성, 동호인을 모아 체계적인 전자음악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연구회는 85년 ‘뎐롱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날까지 대표적 전자음악 연구단체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왕립음악원과 네덜란드 우트레흐트음대에서 작곡과 전자음악을 공부하면서 전자음악의 최신 흐름을 접하기도 했다.
“우트레흐트에서 전자음악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데 미디가 개발되자 그 과정이 1년만에 없어져 버리더군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급격한 변화였습니다.”
귀국한 뒤 그는 추계예대와 서울대 교수 등을 역임하며 ‘신시사이저 입문’ ‘전자음악의 이해’ 등을 펴내 전자음악 대중화에 앞장섰다. 94년 ‘서울 컴퓨터음악제’를 창설했고, 97년부터 인터넷 공모를 통해 국제적 컴퓨터음악대회로 발전시켰다.
“전자음악이라고 하면 비인간적이고 감성이 배제된 음악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신호음을 전자음악이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전자음악은 실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음향을 가능하게 하고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열어줍니다.”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