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가 일정한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역사 발전의 중요한 지표로 들고 있는 것이 ‘자유의 신장’이다. 그러나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린 2차대전의 잔혹함을 목격하며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한탄한 프랑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말을 상기한다면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단지 축복받은 일만은 아닌 듯하다.
사실 ‘자유’가 인간의 주요한 덕목으로 본격 거론돼 온 것은 300∼400년 정도다. 험난한 자연 속에서 생존이 절대절명의 과제였던 시절에는 위대한 자연과 전지전능한 신, 그리고 자연과 신의 뜻을 먼저 파악했다는 소수의 선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라는 지금까지도 삶이 신이나 위대한 지도자, 별자리, 사주 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유 의지’대로 산다는 사람보다 특별히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 "자유는 필연성의 의식" ▼
▽베란다에서의 자유〓‘나는 아파트 20층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자유를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했다. 중력의 법칙과 같은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뜻이든 자연의 법칙이든 필연성에의 순종을 전제로 한 인간의 선택이 모두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선택을 하기까지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추적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인과관계를 찾는다면 자유의지를 철저히 부정할 수 있다. 그가 IMF사태로 실직하지 않았더라면, 긍정적인 성격이었더라면 20층에서 그냥 뛰어내리기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길가의 포장마차로 갔으리라는 것이다.
▽국가와 이념의 선택〓‘자본주의를 원했다면 자본주의 국가에 태어나기를 택했어야 했다.’
자신의 이념으로 자본주의를 택하든 사회주의를 택하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들 대다수가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선택이 자유의지뿐 아니라 문화적 환경에 좌우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이념과 통제장치를 만들어 내면서 또 한편에서는 그 통제장치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독일의 니체에서프랑스의 조르주 바타유나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까지 법률, 가치관, 성, 종교, 노동 등의 금기와 구속에 대한 도전은 끊이지 않는다.
▼ 스스로 만든 통제와의 싸움 ▼
▽자유와 통제의 이중주〓한편에서는 국민의 도덕적 자율성을 믿을 수 없어 국가기관이 여자 경찰서장을 내세워 미성년자 매매춘을 단속하고, 또 한편에서는 국가의 통제장치에 의한 정치개혁을 더 이상 못 믿겠다며 시민이 자율적으로 벌이는 ‘불법적’ 낙선운동 앞에 국가기관의 통제력이 맥을 못춘다.
인간은 일정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가치관을 형성하지만 반성적 사고를 통해 문화 또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교육의 주요한 목표는 바로 이런 반성적 사고 능력의 형성이었다. 기존의 가치관과 제도를 끊임없이 재검토하며 사르트르의 ‘저주스러운 자유’를 택하든 군중속의 불안과 고독을 피해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택하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프롬이 비판했던 나치 하의 독일인들이 그랬듯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피할 길이 없다.
김형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