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눅스 혁명과 레드햇' 로버트 영·웬디 골드만 롬 지음/최정욱 옮김/김영사 펴냄/9900원▼
"그건 며느리도 몰라."
며느리에게도 알리지 않을 만큼 꼭꼭 숨겼던 장맛, 매일 수억 병씩 소비되지만 그 성분과 배합만은 최상층부 몇 사람밖에 모른다는 코카콜라의 톡 쏘는 맛. 엇비슷한 다른 것들을 뒤로 따돌리게 하는 이 '비결'(秘訣)들은 끝내 어둠속에 머문다. 혈육에게조차 쉽사리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이다.
이러한 정보의 폐쇄성을 부추기는 것은 독점에 따른 압도적 부(富)와 영향력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신기술과 원재료가 '특허'라는 이름의 갑옷을 걸친다.
전세계 컴퓨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힘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도스(DOS) 윈도95 윈도98 그리고 윈도2000으로 이어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PC용 운영체제들은 누구도 베끼거나 변조할 수 없는 0과 1의 암호들로 위장하고 있다. 천문학적 부와 영향력을 더욱 굳혀주는 보증수표이기도 하다.
이 운영체제의 속내 - '소스코드'(Source Code)라고 한다 -를 온세상에 샅샅이 공개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누구라도 그 코드를 변형할 수 있고, 새로운 코드를 집어넣어 얼마든지 새로운 변종 운영체제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식'에 따른다면 그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몰라서 묻나? 그 회사는 하루아침에 망하고 마는 거지….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큰 성공을 거둔 것. 그저 화제만 모은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돈까지 끌어모은 것이다. 레드햇(Redhat)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기업이 '이(e)-비즈니스 개념을 통째로 뒤바꿔버린' 곳으로 각광받게 된 연유도 거기에 있다.
레드햇 - 그 이름에 걸맞게 로버트 영 사장은 늘 빨간 모자를 쓴 채 카메라 앞에 선다-이 파는 제품은 리눅스(Linux). 1991년 핀란드 헬싱키대학의 컴퓨터학과 학생이던 리누스 토발즈가 그 때까지 써오던 유닉스(UNIX) 운영체제를 변형·개선해 내놓은 이래 수많은 고수(高手) 프로그래머들이 가세, 윈도의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신개념의 운영체제다. 그 내부 코드까지 속속들이 공개되며, 따라서 내로라 하는 프로그래머들이 자유롭게 수선·보완·개선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눅스는 '인터넷형 운영체제', 혹은 '21세기형 운영체제'로 불리기도 한다.
1995년 설립된 레드햇은 리눅스의 그러한 '열린' 특성을 고스란히 끌어안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반 시스템 이용자들도 손쉽게 이용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및 기술 지원 등을 더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패키지에는 리눅스, 리눅스용 응용프로그램들, 성분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소스코드, 초기 기술 지원 자료 등이 담겨 있다. 값은 50달러(약 6만원). 동급 운영체제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NT에 견주면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이다. 그러면서도 프로그램의 성능은 대등하거나 도리어 앞선다.
저널리스트인 웬디 골드만 롬은 '리눅스 혁명과 레드햇'(Under the radar)이라는 책에서, 3~4년 전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한 기업이 어떻게 초거대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의 강력한 라이벌로 급부상하게 되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추적한다. 시기적으로 다른 여러 사건들을 적절하게 배치, 소설적 긴장감을 조성해가는 그녀의 기량은 퍽 빼어나다. 레드햇 주변 인사들의 악전고투, 그 회사를 탐색하고 성공 가능성을 모색하는 컴퓨터 기업 인사들의 다채로운 표정과 반응 등에 대한 묘사도 스피디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변화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라고 리눅스의 폭발적 성공을 감탄하는 로버트 영의 발언과, "나는 리눅스 움직임의 방향이 바뀔까 두렵다. 과거에는 재미있고 멋진 것이었는데 이제는 진짜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라고 우려하는 또다른 목소리를 대비시킨 것도, 한 비즈니스 모델의 성공에 대한 일방적 찬사를 경계하는 롬의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여겨진다.
벼락 성공을 거둔 벤처기업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레드햇의 초라한 출발로부터 눈부신 성공(나스닥 상장 첫날 주가는 14달러에서 52달러로 폭등했다)에 이르는 길은 극적인 사건과 암중모색, 피 말리는 눈치 작전, 거래 성사를 노린 치밀한 전략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을 권하는 데는 상당한 망설임이 앞선다. 원서가 아닌 번역본 얘기다. 솔직히 말한다면 번역본 구입만은 말리고 싶다. 번역본을 읽어가는 과정은 '고행'(苦行)에 가깝다. 생경한 번역투 문장들이, 마치 지뢰처럼 사방에 널려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도 일관성이 없고, 군데군데 자잘한 오역도 눈에 띈다. 초벌 번역만 끝낸 채 조급하게 출판된 게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이런 표현들을 보자.
'…마이크로프로세서 자이언트 앞에 설 때면 소프트웨어 비즈니스에 있어서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정식 프리젠테이션을 하곤 했다.'
'한 업계 자이언트로부터 받은 인수 오퍼를…'
'1만스퀘어피트 사무실…'
'오픈되어 있다면…오픈된 표준…'
'프로세서 레벨에서…'
'번들드버전'(Bundled Version)
'벤치마크로 사용된 리눅스 서버를 미스컨피규(misconfigure)했음이 판명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브룩하벤(Brookhaven·브룩헤이븐), 슈트(Suite·스위트) 어윙(Ewing·유잉) 로스 알라모스 국립실험실('실험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규모다. 국립연구소라고 해야 옳다) 클라이너 퍼킨스(Kleiner Perkins) 코필드 & 바이어스(Caufield & Byers·실제로는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 바이어스'라는 이름의 한 회사다) 같은 실수들은 독자를 더욱 짜증스럽게 만든다. 이 정도 번역이라면 차라리 원서를 읽는 쪽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조급증은, 때로 의도된 게으름보다 더 해롭다.
김상현dot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