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1월28일 각국 대통령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굉장한 하루를 보냈다. 상하 양원 의원들과 장관들, 그리고 외국 외교사절들을 굽어보며 연두교서 발표 연설을 하는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는 ‘세계 제일의 권력자’인 미국 대통령의 힘이 담겨 있었다.
클린턴은 89분간 연설을 하면서 무려 128차례 박수를 받았다. 그중 절반 정도는 기립박수였다. 전세계의 CNN방송 시청자들은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는 앨 고어 부통령이 클린턴에게 박수를 보내기 위해 쉴새없이 상원 의장석에서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날의 연설은 클린턴의 ‘쇼’였다. 그러나 재임 중 8번째이자 마지막인 클린턴의 연두교서 발표는 웃고 즐기면 끝인 그런 평범한 쇼는 아니었다.
우선 클린턴이 발표한 연두교서는 공허한 레토릭이 아닌 구체적인 정책의 결정체였다. 그는 향후 10년간 3500억 달러의 재원을 마련해 교육 환경 보건 및 범죄퇴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모두 61가지의 새 정책을 쏟아냈다. 대통령으로 8년간 재임하면서 아이디어와 힘이 다 소진됐을 만도 한데 이날 미 하원 본회의장에 나타난 클린턴은 퇴임을 앞둔 쭈그러진 권력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갓 취임한 대통령인양 의욕이 넘쳤다.
그렇다고 클린턴이 ‘원맨쇼’를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청합니다(I ask you)” “함께 합시다(Let’s do it together)” 등의 표현을 유독 많이 사용했다. 이는 현장에 있던 의원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고, TV를 시청하고 있는 미국인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하겠다고 약속한 ‘21세기 미국의 혁명’에 국민과 의원들이 동참해 줄 것을 반복해서 간청했다.
클린턴은 또 여러 명의 조연을 동원해 자신의 쇼를 미국인들이 실감할 수 있게 했다. 권총 구입절차를 강화하겠다는 정책을 밝힐 때는 컬럼바인 고교 총기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뒤 총기규제 주창자가 된 톰 마우저를 일으켜 세워 기립박수를 받게 했고 인종차별 문제를 거론할 때는 왕년의 홈런왕인 흑인 행크 아론을 조연으로 활용했다. 클린턴은 부인 힐러리에게는 “30년 동안 나를 도와주었다”며 기립박수 속에 파묻히게 해 ‘죄 지은 남편들’에게 속죄하는 방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연설을 듣고 나서 ‘클린턴은 괜찮은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잘 했다’며 그가 저지른 섹스 스캔들 등의 잘못을 용서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외국 지도자 가운데는 나름대로 교훈을 얻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연설을 시청했을까, 시청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간이 버린 오물로 더럽혀진 강물은 여름철 홍수 덕분에 더러운 찌꺼기를 털어낸다. 한국 정치의 강물에 덕지덕지 쌓여있는 오물을 시원하게 쓸어버릴 홍수 같은 ‘대통령의 쇼’를 우리가 볼 날은 언제일까.
방형남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