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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건강/임산부와 아기를 배려하는 분만법]다양한 분만문화

입력 | 2000-02-03 23:40:00


원하는 환경에서 원하는 방법으로 분만하는 외국 여성들 프랑스의 어느 평범한 가정. 오늘 이집에선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다. 그러나 전혀 소란스럽거나 번잡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둡다 싶을 정도로 몇 개의 간접조명만 켜져 있는 집안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흐르고, 주방에선 남편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배가 남산만큼 나온 산모는 웃옷만 걸친 채 주위를 서성인다. 단지 조산사만이 산모의 상태를 주시하면서 식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을 뿐이다. 얼마 뒤 산모가 통증이 오는지 고통스런 표정으로 남편을 껴안는다. 그러다 통증이 멎으면 움직이면서 노래도 부르고 다시 통증이 오면 벽이나 탁자 등에 기대 복식호흡과 체조를 한다. 남편도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아내를 격려하며 함께 열심히 심호흡을 한다. 이러기를 여러번, 조산사가 산모의 자궁 입구를 살피더니 분만시기가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그러자 산모는 팬티를 벗고 소파에 기대서서 한껏 힘을 준다. 그 순간 예쁜 아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조산사는 아기를 받아 즉시 엄마 품에 안겨준다. 몇 분이 흐른 뒤 남편이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조산사는 아기를 부드러운 천에 싼 뒤 몸무게를 잰다. 그런 다음 아기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와 방긋 웃다가 젖을 물고는 잠이 든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든 이런 가정분만은 흔한 일이다. 프랑스의 경우 자연분만을 하는 80% 이상의 산모가 집에서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아기를 낳을 정도. “유럽에선 가정분만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모든 가족이 분만과정을 함께 하면서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탄생의 기쁨을 함께 느끼는 거죠. 또한 산모도 가정의 부드럽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분만과정을 겪다 보니 고통도 훨씬 덜 느끼는 편이고 가족의 배려와 사랑 때문인지 갓 태어난 아기도 평온함을 유지합니다.” 임산부 전용도서관 ‘토끼와 여우’ 장은주 실장은 유럽에서 경험한 가정분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또한 가까운 일본을 비롯 외국의 산모들은 분만자세에 있어서도 우리처럼 일률적으로 누워서 낳는게 아니라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침대나 소파에 엎드려 낳기도 하고, 쿠션을 껴안고 낳는가 하면, 천장에 매놓은 끈을 부여잡기도 하고, 바닷물이나 욕조에 쪼그리고 앉아 수중분만을 하기도 한다. 바로 아기 낳기에 적당하면서도 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 그렇다 보니 이를 돕는 분만 의자 등 최신식 다양한 분만 기구들까지 등장하는 추세다. 한양대의대 산부인과 박문일 교수는 최적의 분만자세로 ‘앉는 자세’를 꼽는다. “침대에 누워서 분만하는 국내 분만방식은 미국식을 따른 것인데, 실제로 아기를 낳기 위한 가장 좋은 자세는 쪼그리고 앉는 자세입니다. 앉은 자세에서 골반이 가장 잘 벌어지고 힘을 주기도 쉽거든요. 이제 국내병원에서도 산모들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수중분만 등 다양한 인간적인 분만법이 보편화돼야 한다고 봅니다.” 침대에 누워 혼자 힘겨운 고통과 맞서야 하는 우리나라의 분만 간간이 산통을 느낀 김숙현씨(29)가 서울의 한 종합병원을 찾은 시간은 저녁 10시. 함께 온 남편과 헤어져 분만대기실로 들어간 김씨가 처음 접한 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산모들의 비명소리와 일손이 모자란 간호사들이 산모들을 향해 내뱉는 짜증섞인 목소리였다. “아, 아,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살려주세요.” “소리지르지 말고 좀 참아요. 오늘은 왜 이렇게 유별난 산모가 많아….” 관장을 하고 태아 심장박동 체크기를 허리에 두른 후 침대에 누운 김씨는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산모들의 비명소리를 듣자니 분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차라리 밖에서 남편과 같이 있다 통증이 더 심해지면 들어올걸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기를 얼마 뒤 산통 간격이 좁혀지면서 고통은 심해져만 갔다. 하지만 심장박동 체크기로 인해 허리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간호사에게 고통을 호소하면 ‘더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12시간이 흐른 다음날 10시, 남편이 면회시간에 맞춰 분만대기실로 들어왔다. 땀과 눈물로 범벅된 김씨는 ‘수술’을 간곡히 요구했고, 놀란 남편이 황급히 달려가 데려온 의사에 의해 김씨는 곧바로 분만실로 옮겨졌다. 당시 자궁 입구가 완전히 벌어진 분만 직전의 상태였던 것. 그리고는 강한 조명 밑 분만침대에 눕혀져 회음부가 절개됐고, 간호사가 배를 누르는 동시에 한껏 힘을 주어 딸을 출산했다. “아이를 낳던 날은 지금도 생각하기 싫어요. 한동안 애도 보기 싫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제가 받은 고통보다 아이의 충격이 훨씬 컸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이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둘째 애를 낳을 때는 분만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꼼꼼히 따져 인간적인 분만법을 선택할 생각입니다. 만약 제가 원하는 병원이 없다면 집에서 낳는 것도 고려중이에요.” 이런 분만환경을 어쩌면 우리는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지 모른다. 주위 대부분의 산모들이 똑같은 분만과정을 거치기 때문. 하지만 외국에서 인간적인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에겐 한마디로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다. 병실에서 남편과 함께 진통과 출산을 끝내고 분만 뒤 산모와 아기가 같은 방을 쓰는 게 당연한 곳에서 출산을 한 그들에겐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 때문. 지난 96년 미국 파견근무중 첫아이를 출산한 김선영씨(32)는 “우리나라 분만현실을 익히 알고 있어 둘째를 낳을 때 일부러 유명한 병원을 찾았는데도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며 “우리나라 여성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나라 제왕절개 수술 비율이 선진국보다 높은 것도 이런 열악한 분만환경과 무관치 않다. 한양대의대 박문일 교수는 “산모들 대개가 꼼짝없이 누운 상태에서 가족도 하나 없이 혼자서 진통을 겪다보니 고통을 참지 못해 제왕절개 수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만약 산모가 좋은 출산환경에서 분만을 하게 돼 정신적으로 출산의 고통을 이길 수 있다면 자연히 제왕절개 수술의 비율은 낮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아기를 무 뽑듯 뽑아내는 우리의 분만환경은 왜 안 바뀌는 것일까. 의사들은 ‘의료수가’가 주범이라고 말한다. 의사의 분만 처치료가 5만원 안팎에 불과해 방값 등으로 수지를 맞춰야 하는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제왕절개수술을 하면 20만원 정도를 받지만 자연분만의 경우 방값과 밥값을 포함해도 30만원이 안되는 상황에서 좋은 분만환경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