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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오웅진/다시 새로운 출발앞에서

입력 | 2000-02-06 19:49:00


설 연휴가 끝나는 날 아침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이 변했고 또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것, 아니 변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아마 명절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명절이 되면 흩어져 살던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을 추모하고 음식을 나누며 어른을 찾아뵙게 되는데 특히 설 명절에는 세배를 올리고 덕담을 청해 듣는다. 이때 각자 살고 있는 처소가 다르니 세상 곳곳의 돌아가는 이야기도 서로 나누게 된다.

지난 76년 최귀동 할아버지를 만나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나의 전 재산이었던 1300원을 털어 그들에게 블록집을 지어주고 어진 일을 하려고 속세를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소속리산(小俗離山) 인곡(仁谷)에 괭이 한자루 들고 올라와 산을 일궈 자리잡은 꽃동네에서 설을 맞이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24년. 나는 올해도 꽃동네 가족 봉사자 수도자들과 함께 설 명절을 지냈다. 떡국도 끓이고 고기와 과일도 장만해 먹었다. 모시고 있는 노인들께 세배를 드렸고 세배하러 찾아온 우리 아이들, 봉사자 수도자들과 함께 마음껏 즐거웠다.

이제 다소 상기됐던 명절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한번 더 지나온 시간들을 성찰하면서 다가오는 시간들을 새롭게 다짐해보아야 할 시간이다. 나는 지난 1월 4일 최귀동 할아버지 선종 10주기를 기해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님께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에 입회하고자 요청서를 제출해 28일 정식으로 허락받았다. 그날 저녁 TV는 ‘오웅진 신부가 24년 만에 꽃동네를 떠난다’는 뉴스를 전했고 다음날 여러 신문이 일제히 이 내용을 보도했다. 언론보도 후 여기 저기서 “오신부님이 꽃동네를 떠난다니 어찌된 일이냐. 그게 무슨 소리냐”며 참으로 많은 전화가 걸려왔고 울며불며 찾아온 꽃동네 회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아주 많은 분들이,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한 분들에서부터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혹은 강원도 산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부족한 나를, 아니 꽃동네를 걱정해주셨다.

꽃동네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부산 꽃동네 회원 모자는 밤새껏 울고 다음날 부산을 출발해 꽃동네 도착할 때까지 눈물을 쏟고 왔단다. 중학교 2학년인 그 아이는 앞으로 꽃동네 신부가 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자주 어머니와 함께 꽃동네에 오고 있다. 이번 일 하나로만도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절감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꽃동네와 부족한 한 사제를 사랑해주셨는지도 알았다.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내가 더 잘 살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내가 꽃동네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꽃동네에 뼈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76년 사제 서품 후 24년 동안 청주교구 소속 사제로서 그 직무를 수행했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며 때를 기다렸던 수도사제의 삶을 2000년 대희년에, 그것도 최귀동 할아버지 선종 10주기에 시작했다.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오직 하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치 않는 그것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뻐하며 사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꿈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나의 생애가 죽음으로써 더 아름다운 꽃동네로 성장하도록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세상은 한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을 선으로 갚고, 악도 선으로 갚는 희생과 보속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다. 이제 나의 남은 생애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섭리로 창설된 꽃동네 남녀수도회(예수의꽃동네 형제회·자매회)의 300여 수도자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투신할 것이다.

오웅진(꽃동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