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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담론]제사는 '문화 동질감' 확인하는 축제

입력 | 2000-02-07 19:48:00


전세계의 모든 소식이 실시간(real time)으로 전해져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에 살면서도 설날에는 여전히 교통난을 무릅쓰고 ‘민족의 대이동’이 단행된다. 올 설 연휴에도 약 2700만명이 이동했던 것은 바로 ‘차례’를 함께 지내며 조상에게 문안드리고 친척과의 끈질긴 ‘핏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종교학자 머치아 엘리아데는 “제의(祭儀)를 통해 신화적 원형의 모방과 본이 되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시간의 거리가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조상이 행해 온 차례(茶禮) 또는 제사(祭祀)라는 제의의 모방과 반복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조상으로부터 ‘나’를 거쳐 후손에 이르는 혈족의 동질감, 그리고 같은 형식의 제의를 행하는 문화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임을 체험▼

▽축제와 제사〓포도 재배법을 발견하고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디오니소스. 제우스와 세멜레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나 반신반인(半神半人)의 불완전함과 저주받은 광기를 가졌던 그는 술과 축제와 신이 됐다.

그보다 더 불완전한 인간은 신화적 원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디오니소스의 축제와 같은 광란의 향연 속에 빠져 신적인 창조력을 경험한다. 춤과 술 또는 환각제 등을 통해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하나’임을 체험하는 ‘무아경(無我境·ecstasy)’에의 몰입은 지금도 흔히들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자의식이 강해져 남과 자신을 구분하게 되면서 이런 식의 제의로는 무아경의 경험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엄숙하고 복잡한 제의 형식을 갖추며 이 절차에 참여하는 구성원 사이에 동질감을 확인하게 됐다.

▼소속집단의 역사와 만나▼

▽역사와의 만남〓유교의 제사, 사원의 법회, 교회의 예배, 학교의 종강파티, 직장의 신년하례식, 동문회나 향우회…. 신을 모시는 엄숙한 기도회부터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지는 광기어린 축제까지, 우리는 온갖 제의 속에 살아간다.

어떤 형식의 제의든 그것은 그 집단이 그 순간까지 존속하고 발전하도록 한 ‘역사와의 만남’이다. 제의는 눈에 보이는 구성원만의 축제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도록 한 신과 조상과 선배와 동료가 함께 참여하는 축제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사람들은 제의를 통해 신, 영웅, 조상의 행위를 모방하고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이어받는다. 제의 참여를 통해 집단과 자신의 합일을 경험하며 엄청나게 커진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뿌듯해 하는 것이다.

▼사회교육의 場 이기도▼

▽집단 무의식과 제사〓칼 융에 따르면 고대에 존재했던 조상들의 집단적인 기억이나 이미지에 의해 이뤄진 ‘집단 무의식’이 개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한국사회의 남녀불평등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제사의 과정을 혐오하며 제사를 거부하겠다고 나선 어떤 이는 이런 집단 무의식의 핵심을 ‘가부장제의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사의 참모습은 나를 존재하게 한 수많은 조상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 친지간의 혈육애와 문화적 동질감, 그리고 가족사에서 출발해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자각하면서 갖게 되는 삶에 대한 경건함 등의 소중한 경험을 함께 하는 축제의 장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가부장제의 억압도 배어 있지만 그것은 기존 질서 유지의 기능을 갖는 모든 제의에 있을 수 있는 폐해의 일단일 뿐이다. 오히려 설레는 마음으로 만남을 기다리며 함께 선물과 음식을 준비하고 더불어 방바닥까지 머리를 숙이며 어울리는 제의의 전 과정은 이 시대에 걸맞는 사회인이 되는 법을 익힐 수 있는 중요한 사회교육의 장이다.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