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로 올림픽을 유치한 일본 도쿄는 무엇보다 먼저 화장실을 고치기 시작했다. 서울의 올림픽개최가 확정됐을 때 서울시장은 서울 거리에 더 많은 나무를 심겠다는 다짐을 했다.”
1956년 개최된 멜버른올림픽 이후의 모든 올림픽을 취재한 바 있는 호주의 저명한 체육기자 해리 고든의 회고담이다.
2000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호주 시드니에선 개막을 7개월여 앞두고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을까. 지난달 올림픽촌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뜻밖에도 마이클 나이트 올림픽 장관 등 시드니 올림픽 조직위원회(SOCOG) 관계자들이 열흘 정도씩 한가롭게 휴가를 떠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휴식도 일의 연장’ ‘놀 줄 모르면 일도 못한다’는 등 호주사람들 특유의 휴식에 관한 금과옥조는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올림픽촌 어디에도 주인은 없고 관광객들만 투어버스를 타고 올림픽 시설물들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다.
버스를 타고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1시간 남짓 둘러보니 당장 내일 개막식을 치를 수 있을 만큼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였다.
선수촌 등 모든 부대시설도 완공됐고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공원으로 조성한 올림픽공원도 오래 전에 개장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올림픽공원은 호주 텃새들의 보금자리이자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으로 한국 중국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각종 철새들이 날아온다고 한다.
여의도 크기와 비슷한 규모의 올림픽촌 여기 저기에는 원추형의 민둥산들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천연 지형물이 아닌 인공으로 만든 산들 같았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올림픽촌을 건설하면서 생긴 동산들이라고 했다. 이름하여 ‘밀레니엄 파크랜드’. 어떻게 저런 밋밋한 민둥산들을 그렇게 거창하게 부를 수 있느냐고 따지듯 질문했더니 “2010년 완공 예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환경테마파크를 건설하는 중”이라고 답변했다.
민둥산들이 생겨난 사정은 이러하다. 올림픽촌이 들어선 홈부시 베이(灣)는 오랫동안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벽돌공장 도축장 군사기지 등으로 활용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주립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됐다.
그후 이곳은 올림픽촌으로 지정되면서 완전 탈바꿈을 하게 된다. 수년간 소독처리와 환경조사를 거친 뒤 쓰레기매립지에다 경기장 건설현장에서 파낸 흙을 옮겨 쌓아 여러 개의 동산을 만들었다. 동산 아래에는 역시 건설현장에서 파낸 각종 나무들을 옮겨 심고 인근에서 채취한 풀씨들을 뿌려 텃새와 토종 동물을 살게 한다는 계획이다. 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인 발상인가.
수십년 동안 쓰레기를 매립하던 구덩이에 흙을 묻고 차근차근 흙을 쌓아올려 민둥산을 만든 다음 세계에서 가장 큰 환경공원을 만들고 있다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문득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 엉겨 붙은 뿌리들은 무엇인가. 흙더미, 쓰레기 속에서 무슨 가지가 자란단 말인가?’
지난해부터 호주 관광당국은 ‘새 천년을 맞는 첫 번째 대륙’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올림픽 개최국의 분위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시드니 당국은 밀레니엄 파크랜드를 새 천년의 새아침도, 올림픽 개최일도 아닌 2010년쯤 완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올림픽촌 안의 민둥산들이 자칫 흉물로 비쳐질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파크랜드를 완공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말했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던 환경팀의 데이비드가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새들이 그 안에다 둥지를 만드는 일은 밀레니엄 돔에다 로봇을 설치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더구나 제3기 밀레니엄은 아직 999년이나 남았는데….”
윤필립(시인·호주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