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대형 사건들의 종적이 묘연하다.
‘89년 김대중(金大中·대통령)평민당총재 1만달러 수수 사건’ ‘언론대책문건사건’ ‘총풍(銃風) 고문 의혹 사건’ 등 수사착수 당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사건들이 매듭을 짓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검찰은 피의자의 소환 불응, 관련 재판의 진행 등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사건을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한 법조인은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큰 산이 요동치게 하더니 겨우 쥐 한 마리를 잡았다는 뜻)’이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며 “그 요란하던 검찰 수사에서 ‘쥐’가 잡혔는지 아니면 ‘호랑이’가 잡혔는지 알 도리가 없다”고 꼬집었다.
▽1만달러 사건〓검찰은 서경원(徐敬元)전의원 등 고소인과 89년 당시 수사검사들에 대한 조사를 지난해 모두 마쳤다. 검찰관계자는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소인이자 피의자인 정의원이 소환에 불응하기 때문이라는 것. 검찰은 정의원에게 6차례 소환장을 보냈다.
임승관(林承寬)1차장검사는 8일 “수사발표를 하려면 피의자를 기소해야 하고 기소를 하려면 피의자를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원이 계속 소환에 불응하면 이 사건 매듭은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 그렇다고 검찰이 정의원 조사에 적극적인 것 같지도 않다.
수사 관계자는 “총선을 앞둔 시점에 정의원 체포영장 등을 청구한다면 ‘검찰이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언론문건 사건〓지난해 10월27일 이강래(李康來)전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정의원을 고소하면서 수사가 시작된 이 사건도 정의원의 소환 불응을 이유로 몇 달째 답보 상태다. 검찰은 내부적으로 ‘해프닝에 불과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 7장짜리 문건 사본을 훔친 혐의로 이도준(李到俊)전기자가 구속된 것이 유일한 ‘수사 성과’다.
문건을 작성한 문일현(文日鉉)전기자는 이 사건 때문에 출국금지돼 있었으나 수사 발표가 늦어지자 법원의 허가를 받고 지난달 30일 중국 베이징으로 출국했다.
▽총풍 고문의혹 사건〓98년 10월 구속기소된 총풍 3인방이 “국정원에서 고문을 당했다”며 의혹을 제기해 시작된 수사는 국정원 관계자를 소환 조사하는 등 빠르게 진행됐으나 지난해 초 총풍사건 재판이 본격화하면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검찰은 “총풍사건 재판 결과를 지켜본 뒤 판단을 내리겠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고문경관’ 이근안(李根安)씨의 자수 이후 ‘고문은 반인륜적 범죄’라며 공소시효가 지난 고문사건까지 수사해 그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으로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법조계에서 일었다.
태백산맥 및 특별검사 수사의뢰 사건〓94년 4월 시작된 조정래(趙廷來)씨의 ‘태백산맥’에 대한 이적성 수사는 만 6년째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조씨를 소환 조사했고 사회단체와 학계 등에 이 책의 이적성을 문의했으나 그 의견이 저마다 달라 판단을 못 내리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강원일(姜原一)특별검사팀은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현직 검사 2명과 노동부 관계자 2명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그러나 그 수사의뢰서와 관련 기록은 현재 대검 캐비닛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파업 유도 사건’ 본안에 대한 재판이 끝난 후에야 수사 착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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