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개혁보다 더 무서운 것은 광속(光速)으로 변하는 인터넷 사업환경.’
정보통신 분야의 눈부신 발전으로 사업환경이 급변하면서 재벌들의 선단식 경영이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를 맞았다. 계열사들을 동원해 신규사업에 진출하는 ‘그룹경영’은 이미 자취를 감췄고 주력 계열사들은 그룹 경계를 뛰어넘는 ‘합종연횡’에 한창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은 그룹 해체까지 불러올 수 있는 새로운 환경과 기존 경영 패러다임의 ‘접점’에서 당혹해하고 있다.
▽위기 맞은 그룹경영〓지난달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정유 삼성전자 삼성카드 아시아나항공 등 11개 대기업이 그룹 영역을 뛰어넘는 인터넷 공동마케팅 컨소시엄 출범을 선언했다. 이 컨소시엄에서 제외된 대기업들은 이제 인터넷 상거래사업을 ‘독자적으로 벌이느냐, 다른 그룹 계열사와 손을 잡느냐’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LG의 한 임원은 “다른 그룹 계열사끼리의 짝짓기가 일반화되면 같은 그룹 내에서도 계열사간 이해가 충돌하는 사례가 빈번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물산이 최근 개장한 사이버장터 ‘삼성몰’엔 계열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LG 대우전자 등 가전 경쟁업체 제품이 수북히 쌓여 있다. 삼성물산측은 “소비자 편의를 위해 제품 구색을 다양하게 갖춰야 하는데 굳이 계열사 제품만 고집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다른 그룹 계열사가 벌이는 전자상거래 사업도 사정은 마찬가지.
▽선단경영의 ‘첨병’ 종합상사 해체되나〓사업기회를 가장 먼저 포착하고 계열사 투자를 유도해온 종합상사들은 요즘 혁명적인 ‘해체’의 수순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물산은 인터넷음악방송 사이버서적 등 신규사업은 물론 중장기적으로 기존 사업부문까지 분사하는 사업전략을 최근 내놓았다. 지난해 32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공룡기업’을 2006년까지 100개 정도의 자회사로 쪼갠다는 것.
LG상사도 2005년까지 기존 사업과 신규사업을 분사하고 전자상거래를 강화한다는 장기 구상을 발표했다. 핵심 사업 부문인 화학 및 비철금속 사업을 ‘켐라운드(Chemround)’ ‘스틸라운드(Steel round)’ 등으로 전문 포털사이트화하고 사이버거래 추세를 보아가며 기존 인력 및 자원을 재조정할 방침.
▽더욱 느슨해진 계열사간 연대〓재벌들은 정부의 200% 부채비율 가이드라인과 상호지보 해소정책 등에 맞춰 몸집을 줄여왔지만 계열사간 연대는 여전했다. 최근 불고 있는 벤처붐에도 불구하고 재벌 관계자들은 그동안 벌여온 ‘오프라인’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LG경제연구원 김주형 상무는 “대그룹들에 사이버 비즈니스의 폭발적 성장은 정부 개혁정책보다 더 파괴력이 있다”며 “몸집이 클수록 변화에 느려지는 만큼 대그룹 체제의 ‘파편화’는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파편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의 기업연합인 ‘게이레츠(系列)’처럼 계열사간 유대가 느슨해질 것으로 점치는 쪽이 많다. 삼성 Y상무는 “현재의 추세라면 삼성내 계열사는 5년내 100개가 넘을 것”이라며 “그룹내 소속감과 그룹간 경계도 모호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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