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고은지음/창작과 비평사▼
백두산 천지에서 마라도까지, 감포 서산 구월산 부소산….
고은 시인이 시집 ‘남과 북’을 냈다. 시인은 겨레의 삶이 이어져 온 강산을 상징과 운율의 실로 누빈다. ‘만인보’의 형식에 이 땅 곳곳의 살아있는 숨결을 녹여 넣은 ‘만경보(萬景譜)’랄까.
서시(序詩) ‘저녁’에서 시인은 이 땅이 이념과 체제로 구분지을 수 없는 삶의 자리임을 노래하며,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무는 공동체의 터전이어야 함을 선언한다.
‘생애의 절반쯤은 나그네였다//나그네로/강산의 뒤를 다녔다/이루지 못한 소원이 남아 있다/내 자식만이 아니라/남의 자식/하나나 둘을 기르고 싶었다/그런 다음에야/누구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누구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지금 남과 북/온통 하나의 낙조 속에 가슴 가득히/못내 아름다워라’
고은으로서는 오랫동안 꿈꾸어온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는 6·25 후 운수승(雲水僧)으로 정처 없이 떠돌았다. ‘내 청춘 전체가 구름과 물이었다’고 회고하는 시인은 98년 여름 보름 동안 휴전선 이북의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남쪽 시인으로서는 ‘선택된’ 행운을 누렸다.
백두산 천지 앞에 선 뒤 뜨거운 감회 속에 오체투지(五體投肢) 했던 시인. 새 시집에서 이념이 의미를 잃는 그 공간의 감동을 노래한다. ‘어떤 교리도 사절한다/(…)/어떤 욕망도 거절한다/햇빛이/시퍼런 칼날 가득히 물에 꽂혔다/시퍼런 물’(다시 천지)
탈북자의 공간 혜산에서는 ‘그동안 버리고 떠나고 싶어도/떠나지 못한 나라였으므로/오래 살아오다가 죽은’ 이들의 비운을 노래하고, 평양에서는 ‘50년 뒤 /나비가 날아다니는 도시이기를’ 기원하며 그 대기의 ‘무거움’을 짚어낸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북녘 풍경이 마냥 무거운 중압 속에 갇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대동강변에서 고려중기 문신 정지상의 이별시와 그를 둘러싼 후세의 풍류를 떠올리는 여유도 그는 잊지 않는다.
남쪽의 공간에서도 시인은 현대사의 아픔과 사람살이의 여유를 교차시킨다. 내장산에서 시인은 ‘아름다움은 한 백년쯤 푹 쉬어야 하느니’라며 느긋함을 갖지만, 광주에서는 ‘수많은 가능성이 죽어버린 도시/어른들은/오늘보다/어제가 너무 많았다’ 며 도시에 드리워진 그늘을 노래하고, ‘탱크가 왔을 때 오늘이었다’며 현재화된 비극을 촌철살인의 일구(一句)로 들이댄다.
“이 시편은 분단현실의 몇 단면에 다가가는 노래다. 그러나 나아가 분단 이후의 어떤 시기에 비로소 들어맞는 노래가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이 시집이 남과 북에서 고루 읽혀졌으면 한다.”
시인은 1년동안 미국 하버드대에 방문교수로 있다가 최근 귀국했다. 창작과비평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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