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가기 싫어 허둥댐도, 힘없이 어깨가 처져 가엾지도 말고 그냥 편안히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불가에서는 선사들이 항상 되뇌는 말이 있다. “저승사자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느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호통치며 데려갈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평생 수행의 결과는 살아 있을 때의 큰소리가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인 갈 때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봐야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살아서 힘이 있을 때는 어두운 업보들이 가려져서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리라. 부처님께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떠남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씀하시고 열반에 드시면서 평온한 적멸(寂滅)을 보이신 것이다. 잘가심이라는 뜻의 여래여거(如來如去)라고 하고 이를 줄여서 여래라고 했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근원적 죄를 사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온 인류에 사랑을 보이셨던 것이다. 역사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잘 가신 이들은 그들의 정신이 후세에 영원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한다.
물론 잘 갈 수 있는 것은 평소에 집착했던 것들을 거듭거듭 놓아서 마치 스님네들이 결제를 마치고 걸망을 싸서 한 보따리가 넘지 않게 정리하는 것과 같은 무소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어렵다. 얻을 때보다 버리기는 더욱 어렵다. 평소에 버리지 않다가 한꺼번에 버리는 일은 더욱 어렵다. 이 버리는 때를 아는 것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던가. 평소에 비켜주고 베풀어주는 행이 없이는 천명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추하게 퇴장해서는 안된다. 힘에 떠밀려 버둥거리면서 그리고 남을 원망하면서 떠나는 모습은 추하다 못해 한심스럽다. 특히 국민이 싫어하는데도 그래서 지도력을 잃었는데도 그 높은 술수라는 것들을 교묘히 이용해 물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국민은 힘없는 것 같지만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일인지, 어떤 것이 자기네들만을 위함인지 피부로 느껴 잘 안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의 주인인 유권자가 싫다고 하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반성해 앞으로 잘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한 추한 모습은 더욱 우리의 대표가 아니라는 확신만 심어주는 모습인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백성을 위해 공직자가 되기보다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출세를 했기 때문에 권력 지향적이고 항상 국민은 그들의 이용 대상이 됐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매번 달래보지만 역시 선거가 끝나면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로 국민에게 준 고통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의 정치권은 누구도 백성의 고통과 함께 하지 않았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제 정치권이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정치개혁과 자기 이익만을 위해 공직자가 되려는 분들은 아름다운 퇴진을 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기회마저도 놓치게 되면 아름다운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기회마저 잃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적인 지주가 없다고들 한다. 그것 역시 욕심을 놓지 못해서 그렇다.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물러나 후학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그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바른 가르침을 내려주는 선배가 적다는 것은 불행이다.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깃발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암담한 사회인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 역시 노욕 때문이다. 끝까지 후배를 길러내지 않고 본인이 다 하겠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내가 아니어도 이 세상은 얼마든지 굴러간다. 모든 멍에를 짊어진 성직자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기고 정신은 물질을 앞선다’라고 했듯이 물러나는 것은 생명의 끝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에 집착했던 것은 놓아버리고 더 넓은 정신체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역할을 달리 하는 것이다. 씨앗은 자기를 썩혀 새싹을 틔우고 촛불은 자기를 태워 밝히듯이 대승적인 발상을 할 때이다. 그래서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길 바란다.
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