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허준’이 최근 시청률 52.7%(8일 방영분·AC 닐슨 조사)를 기록했다. 역사 관련 드라마가 시청률 50%를 넘은 것은 91년 시청률 조사 시작 이래 처음이다. TNS미디어코리아 조사에서는 1월 중순 이후 평균 시청률 47.6%였다.TNS분석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세대별로 크게 시청률이 다른 일반 드라마와 달리 10대∼50대 연령층을 고루 끌어 들이고 있다.
세 번째 TV드라마화돼 ‘다 아는’ 소재에 ‘권선징악’ ‘고진감래’ ‘자수성가’ 등 단선적인 구조인 ‘허준’이 사회적 텍스트로 자리잡아 열풍을 일으키는 이유는 뭘까.
▼ 허준으로 '바꿔 ▼
“덕은 외롭지 않다” “아직도 그런 의인(義人)이 있을까” 등의 드라마 대사. 하지만 우리 현실에도 ‘허준’이 있을까. ‘콤플렉스로 역사 읽기’의 저자 신용구씨(안양중앙병원 정신과장)는 “IMF사태 이후 몰락하고 있는 중산층은 초인적 능력을 지닌 카리스마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며 “‘허준’은 서민을 감싸안는 휴머니즘의 표상”이라고 분석했다. 시민 전진호씨는 시청자 의견에서 “드라마 ‘허준’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허준’의 작가 최완규는 “많은 이들이 허준을 ‘우리들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김성기 현대사상주간은 ‘허준 영웅화’의 이면을 지적한다. 그는 “‘허준’의 환상에 시청자들이 문화적으로 동조하는 현상은 우리 시민사회가 아직도 현실의 모순을 ‘상상’으로 해소할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광속 예찬의 시대에 '인간'이 그립다 ▼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인간을 엄청난 속도전으로 내몰고 있다. 이를 좇아가든, 탈락하든 ‘광속 문명’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허준’ 열풍은 이에 대한 반사작용이다. 김성기 주간은 “21세기 대두된 새로운 문명론의 그늘에서 고단함을 느끼는 이들이 정신적 고향을 찾게 된다”며 “‘허준’은 우리네 그 무엇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상식 KBS 드라마 국장도 “21세기 첨단과학의 부작용에 대한 불신이 드라마 ‘허준’이 가진 자연친화적이고 동양적인 내용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의료에 대한 불만 ▼
8일 방영분에서 허준은 ‘버들골의 슈바이처’였다. 밤새워 병자를 돌보느라 의과(醫科)에 응시하지 못한다. 유의태는 환자를 외면하고 의과에 합격한 아들 도지에게 “비인부전(非人不傳·사람됨이 합당하지 않으면 예나 도를 전하지 마라)”이라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고 말한다.
김성기 주간은 “의료현실의 비인간성에 대한 불만을 느끼는 시청자들이 ‘허준’의 진정한 의료 행위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고 분석했고 신용구 과장은 “‘허준’에 대한 갈채는 참된 의료진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사실과 픽션 ▼
이 드라마의 폭발적 인기 와중에 조선시대 의학사를 전공하는 김호(金澔서)씨는 최근 박사학위 논문 ‘동의보감 편찬의 역사적 배경과 의학론’(서울대 대학원)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되고 있는 유의태는 실제로는 허준보다 150년 뒤 경남 일원에서 유명했던 유이태(柳以泰 또는 柳爾泰)라고 밝혔다. 김씨는 이밖에도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는 잘못된 통설을 기초로 쓰여진 내용이 많다고 지적했다.
작가 최완규씨는 이에 대해 “역사의 사실 여부와 드라마 전개와는 다른 것”이라면서 “사극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소재를 딴 픽션이기 때문에 ‘허준’의 대본을 실제 연대와는 상관없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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