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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문명의 공존'/ '문명의 충돌'은 없다

입력 | 2000-02-18 19:23:00


▼ '문명의 공존' 하랄트 뮐러 지음/ 푸른숲 펴냄 ▼

1996년12월16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문화원에서는 한편의 드라마틱한 논전이 벌어졌다. 무공의 고수들처럼 팽팽히 맞선 두 토론자는 새뮤얼 헌팅턴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와 하랄트 뮐러 독일 헤센 평화 및 갈등 연구소(HSFK) 소장. 헌팅턴이 입각경험이 있는 미국 외교정책 수립의 ‘막후’라면 뮐러는 유럽의 군비축소 전문가.

뮐러는 이미 93년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문명의 충돌’론을 발표해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던 헌팅턴에 대해 “문명은 공존할 수 있다”고 맞섰다. 이날의 ‘도전1국’ 2년 후 뮐러는 이 책 ‘문명의 공존’을 독일어로 출간했다.

뮐러의 헌팅턴에 대한 공격은 인식론부터 현실 외교정책까지 포괄적인 것이다.

먼저 뮐러는 헌팅턴의 충돌론이 미국의 뿌리깊은 ‘마니교 정치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사가 대립하는 두 진영, 빛과 어둠 사이의 싸움이라고 보았던 마니교도처럼 미국인은 정착민 대 원주민, 자유로운 미국 대 보수적인 제국주의 권력 등 미국사의 중요한 단계마다 ‘우리 대 그들’의 이분법 도식을 들이민다는 것.

헌팅턴은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냉전종식 이후 주 갈등요인을 종교 차이에서 찾았다.

헌팅턴이 ‘이슬람의 피묻은 경계선’을 내세우며 상이한 문명집단간의 분쟁 31개 가운데 21개가 이슬람과 비 이슬람간의 분쟁이었음을 강조한 데 대해 뮐러는 세계지도를 들이밀며 ‘이슬람 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권보다도 육로경계가 현격히 길다’

는 것부터 확인한다. 헌팅턴의 통계는 이미 오래된 가설 즉 ‘육로경계를 사이에 둔 국가들은 갈등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것일 뿐’이라는 반박이다.

헌팅턴의 문명론이 문화 생성의 역동성을 간과해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과 교류하면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한 문명권 안에서도 주류문화와 그에 반기를 들며 변화를 가져오는 비주류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뮐러가 ‘문명의 공존’에 자신을 갖는 근거는 이제 세계가 더 이상 ‘정부의 외교정책’이라는 공식 채널로만 소통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러 사회가 자립적으로 서로 연결해 나가고 있다. CNN방송과 인터넷, 초국적인 비정부기구들은 이런 발전을 가장 잘 보여준다.…지구화의 발전이 내보이는 계기들은 상이한 문명권 사회들 간에 공통점이 줄어들기보다는 확산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근본적으로 ‘문명의 충돌’론이 공산주의자를 대신할 ‘새로운 적’을 찾는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하는 뮐러는 “처방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이다”라고 주장한다.

“강자가 먼저 약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서구에게 요구되는 바이다.”

뮐러는 ‘유럽 안보정책의 방향’ 등에 관한 워크숍을 위해 23일 내한한다. 이영희 옮김.

▼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란 ▼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저서 ‘역사의 종말’(1992년)에서 냉전의 종식이 자유 민주주의의 확고한 승리를 가져왔다는 낙관적 믿음을 편 이듬해 미국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새로운 대립적 갈등구조가 형성됐다며 문명충돌론을 제기했다.

헌팅턴에 따르면 이제 충돌의 계기는 국가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문명이다. 헌팅턴은 세계의 문명을 7, 8개 권역으로 나누고 탈냉전시대의 국제분쟁이 문명 대립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갈등. 대표적 사례가 보스니아 내전이다. 서구국가들이 가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와 동맹을 맺었고 정교 국가인 그리스는 세르비아를 도왔으며 이슬람 국가들은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를 명백하게 지지했다는 것이다. 헌팅턴은 또 비슷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은 서로 뭉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 안에서 질서 부여기능을 할 수 있는 핵심국이 두드러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문명은 가족의 확대판이며 핵심국은 가족의 웃어른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