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의 독선 독주 독단을 견제할 수 있어야 진정한 안정이 가능합니다.” 4년 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총재가 야대(野大)안정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의 이회창(李會昌)선거대책위의장이 여대(與大)안정론으로 응수했다. “여당 의석이 과반은 돼야 개혁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청와대 주인이 된 김대중대통령은 작년말 16대 총선용 안정론을 선창했다. “여권이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경제도 동요할 것이며 노동계의 불안도 막지 못해 제2의 남미가 될 수 있습니다.”
DJ신당에 몸담게 된 서영훈(徐英勳)민주당대표는 지난주 관훈토론회에서 한술 더 떴다.“여당이 안정의석을 얻지 못하면 국정운영이 또다시 위기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야당사람이 된 한나라당 이회창총재가 이틀 뒤 관훈토론회에서 맞받아쳤다. “견제와 균형을 통해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당의 독주를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이번엔 야당 공천에서 떨려났거나 당권에서 밀려난 사람, 지역민심 운운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줄기차게 외쳐대는 사람, 세상이 비웃는 줄 모르고 허명(虛名)에 용꿈 꾸는 사람, 선거철만 되면 다시 운동화 끈 매고 나서는 사람, 벤처기업 창업하듯이 ‘꼬마신당’ 간판 내건 사람 등이 또 ‘헤쳐모여신당’을 만들지 모른다니 이들은 어떤 안정론을 펼까.
미국 의회는 8년째인 빌 클린턴대통령 임기 중 93, 94년 2년만 빼고 줄곧 여소야대(與小野大)다. 조지 부시대통령 시절엔 거꾸로 공화당이 백악관을, 민주당이 의회를 지배한 여소야대였다. 그런 가운데서 미국경제는 부시정권 후반기부터 10년째 저물가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다.
클린턴대통령이 지난달 연두교서를 발표한 89분간 의회에선 128번의 박수가 터졌다. 임기가 만 1년도 남지 않은 ‘레임덕’ 대통령이 여소야대(상원 45 대 55, 하원 211 대 224) 의회에서 받은 대접이 그렇다.
물론 미국의 경우가 야대안정론의 근거일 수는 없다. 여당이 다수당이었다면 더 나은 경제성적에 더 강하고 안정된 미국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대안정론에 힘을 더 실어줄 근거도 희박하다. 김대통령도 4년 전에는 반대론을 폈고….
김대통령의 말 바꾸기에 대해 서영훈대표는 이렇게 옹호했다. “야당이던 그 때는 정치적 비전을 국정에 실현해 보려고 애국적 경륜에서 하신 말씀일 것이고, 대통령이 된 지금은 국정이 잘 돼야겠다는 말씀인 것으로 봅니다.”
구차스럽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야당일 때는 권력을 잡고 싶었고, 지금은 권좌에 올랐으니 입장이 다를 수밖에’라는 얘기로 들린다. 결국 여당이 주장하는 안정론은 ‘위하여(與)’ 안정론일 뿐이고, 야당이 펴는 안정론은 ‘위하야(野)’ 안정론에 불과한 것 같다. 정치권 그들만의 ‘나와 우리편을 위한’ 안정론, 즉 ‘위하나(我)’ 안정론인 것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안정론인 양 둘러대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여당에 표를 많이 주지 않으면 제2의 남미가 될 수도 있고 국정운영이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말을 대통령과 여당대표가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은근한 으름장의 냄새가 난다. 과거 정권들이 선거 때마다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 꺼내 썼던 북풍(北風)카드가 연상된다. 국민을 얕잡아보는 것이 아니길 바라고 싶다.
서대표는 “우리는 소수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에 지난 2년간 혼란을 감수해야 했다”고도 말했다. 궁금하다. 소수정권이라서 여론을 ‘마녀사냥’이라고 일축했던가. 김태정(金泰政)씨를 법무장관에 임명하는 등의 잦은 인사 실패와 지역 편중 인사도 소수정권이라서 불가피했던가. IMF상황 하의 고관부인 유한(有閑)사치행태와 옷로비의혹도 소수정권이라서 터졌던가. 당내 민주화조차 못하는 것도 소수정권인 탓인가. 여전히 밀실공천에, 저질 구태(舊態)로 손가락질 받아온 사람들을 정실공천하는 것도 소수정권이기 때문인가. 공기업을 비롯한 정부산하기관들을 여당 잉여인력 집합소로 만드는 것도 그런가. 재정의 심각한 현실과 장래를 외면한 채 선거선심정책을 쏟아내는 건 또 어떤가.
나라의 안정을 깨는 정부여당 내부의 문제는 제쳐놓고 남의 탓만 하면서 여대안정론을 펴는 건 호소력이 약하다.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