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프랑스 비시정권의 경찰간부 모리스 파퐁의 재판을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던 1997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은 “프랑스는 비시를 포함한 자신의 모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비시정권의 모든 행위가 프랑스와 관계 없다고 주장했던 드골주의 덕택에 프랑스는 전승국으로 인정받았고 비시정권의 관리들은 여전히 고위직에 기용돼 왔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신(神)〓1944년 독일 패망을 눈앞에 두고 총살 당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 소르본대 교수로 역사학의 명저 ‘봉건사회’(1939)의 저자이기도 했던 그는 1939년 53세에 2차대전에 종군했고 40년 프랑스가 항복한 뒤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유작인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보다 거대하고 보다 인간적인 역사학을 위해 싸우는” 역사가의 사명을 역설했던 그는 이를 몸으로 실천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군으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는 지조있는 역사학자였던 김준엽 전고려대총장은 “진리와 정의와 선(善)을 마침내 실현해 내는 ‘역사의 신(神)’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 왔다”고 말한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편찬하고 헤로도투스가 ‘역사’를 집필했을 때 인간은 이미 ‘역사의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의리(義理)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바로 이 ‘역사교(歷史敎)’의 순교자였다. 맨 몸으로 형틀에 앉은 선비가 군왕과 맞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보다 명분을 택하는 것이 역사 속의 영원한 승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의 역사와 악의 역사〓사람들은 역사를 바라보며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건들을 통일시켜 체계화하려 한다. 모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이해하기도 쉽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역사를 의리(義理)의 실현과정으로 본 것이나 헤겔이 역사를 절대정신의 구현으로 본 것이 바로 체계화의 일종이다. 헤겔 식의 체계화를 비판했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나 야콥 부르크하르트도 신(神)이나 정신 등을 전제로 또다른 체계화를 시도했다.
체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악을 무찌르고 승리하는 선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나아가 ‘현실에서 승리한 자가 곧 선’이라는 전도된 평가가 내려지는 일도 빈번해진다. 하지만 맹자가 고백하듯이 선이 승리하기보다는 악의 혼란에 빠질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오래 지속된다〓그래서 상과 벌은 선을 권장하고 악의 재발을 방지하는 실질적 장치로 사용돼 왔다. 우리가 죄와 벌의 역사를 공부하며 수없이 역사를 다시 쓰는 것도 역사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최근 오스트리아에 극우연정이 출현한 것을 보며 곧장 일본의 극우화를 우려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역사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양국의 공통점 때문이다. 파퐁의 재판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 결국에는 이 87세의 노인을 감옥으로 보낸 일련의 과정은 프랑스인에게 역사의 준엄함을 가르친 고귀한 교육과정이었다.
미군의 노근리 학살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저질러진 한국군의 만행이나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최근의 낙천낙선운동까지. 이것이 한두번 떠들썩했다고 덮어질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역사의 두려움을 잊고 살아온 우리의 현대사 때문이다. 역사는 오래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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