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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닥터의 건강학]위장질환/고려대의료원 현진해원장

입력 | 2000-02-23 09:14:00


10년전쯤, 고려대안암병원 현진해교수(60)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노인환자에게 “차트가 오면 부르겠으니 나가서 차례를 기다리시죠”하며 내보낸 일이 있다. 낯은 익었지만 별수 없었다. 순서가 안됐으므로.

노인은 몇 차례 더 차트 없이 들어오려다 실패했고 현교수는 한참 지나 진료실 밖에 나갔다가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현서방 맞지? 나 모르겠는가?”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몇 년 만에 조카사위 보러온 처중부(妻仲父)를 환자로 착각한 것이었다.

현교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도 잘못외어 낭패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보직교수에게 이름이 비슷한 운전기사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머리 나쁘니 할 수 없다’며 별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도 못 왼다.

그러나 그는 내시경으로 한 번 본 위(胃)는 몇 년이 지나도 누구 것인지 기억한다.

“위상(胃相)을 보면 관상이 보입니다. 위가 노란 빛이 감도는 분홍색깔에 표면이 매끈한 사람은 얼굴도 점잖거나 얌전하게 생겼습니다. 얼굴이 풍파에 찌들린 사람 중엔 위에 흉터가 있거나 점막이 얇아진 경우 또는 색깔이 빨갛게 변한 위염환자가 많습니다.”

현교수는 하마터면 사업가의 길을 갈 뻔 했다. 중3 때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 의대에 진학했지만 대전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외아들이 조만간 ‘정신을 차리고’ 가업을 이을 것으로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부모는 현교수가 조교수가 돼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상경했다. 이때 삼촌인 현승종 전총리가 현교수 편을 들지 않았더라면 ‘베스트닥터 현진해’는 없었을 것이다.

현교수는 1978년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 도쿄여자의대로 유학을 갔다. 유학초기 여자동료에게 일본어를 배워 여자식 말투 때문에 웃음감이 되기도 했다. 현교수는 걸레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고 밤을 새면서 병원에 보관된 10년 동안의 내시경 필름을 외워나갔다.

그는 1980년 일본에서 내시경 장비를 사갖고 귀국했다. 당시 내시경은 진단 목적으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내시경으로 위질환을 고친다고 하자 일부 의사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낙인을 찍었고 그는 3년 동안 학회에서 ‘투사’가 돼야 했다.

현교수는 내시경을 이용해 위출혈을 치료하고 식도의 이물질을 제거했다. 1982년부터 간경변 환자의 위 식도의 핏줄이 터져 피를 토하거나 혈변을 보게되는 ‘정맥류’의 치료에 내시경을 이용해 한양대 기춘석교수 등과 함께 이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92년 교과서에도 치료방법이 없다는 위 정맥류에 내시경 치료법을 도입, 지금까지 400여명에게 시술, 92%의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밖에도 소화관 협착증, 위 점막하 종양, 일부 조기 위암 등의 치료에도 내시경을 이용했고 지금까지 모두 20여만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국내외에 발표한 논문은 무려 350여편. 지난해 4월엔 영국에서 발간되는 내시경 분야 권위지 ‘밸리어의 베스트 임상과 연구’에 위 내시경 분야 최고권위자 1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돼 후배 전훈재교수와 함께 ‘점막하 종양의 내시경적 치료’란 논문을 싣기도됐다.

현교수는 △과로를 피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금연 절주하며 △과식 편식을 피하면서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것 외에 위장을 보호하는 ‘비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은 이 원칙조차 제대로 못지키고 있다. 매일 오전6시15분 서초동 집을 나서 밤11시에 귀가하는데 밀려드는 환자를 돌보느라 진료실에서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다. 자정경 부인의 ‘구박’을 받으며 저녁을 먹는 것도 일상사. 운동할 시간도 없이 내시경실을 ‘안방’처럼 여기며 지냈으며 이순이지만 담배를 못끊었다. 술자리도 잦다. 그러나 현교수의 위는 참 깨끗하다.

“위에는 신경망이 얽혀있어 ‘작은 뇌’라고도 불립니다. 스트레스나 정신적 충격이 쌓이면 위가 탈날 가능성이 크죠. 낙천적이고 적극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제 위가 깨끗한가 봅니다.”

현교수의 위도 한때 탈이 났었다. 1년에 두 번 후배들로부터 위 내시경 검사를 받는데 지난해 의료원장을 맡고 한달여 골머리를 썩인 뒤 검사를 받자 약한 위염 증세가 보인 것. 그러나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의료원장직이 몸에 익으면서 두 달 뒤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위 질환자 중 15∼20%는 아무 증세가 없는데다 위는 간 당뇨 식도 췌장 등과 밀접해 있어 다른 질환과 증세가 비슷할 경우도 있습니다. 피곤하거나 속이 더부룩할 때 혈액검사만 받거나 자가진단 뒤 ‘괜찮겠지’하며 넘어가면 안됩니다. 위질환이 조금만 의심돼도 내시경 검사를 받고 40대 이상은 1년 최소 한번 검사받아야 국내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위암을 조기진단, 완치할 수 있습니다.”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