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계급(political class)이란 말이 있다. 계급이란 용어가 암시하듯 주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말인데 ‘정치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집단’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말이 원래 그런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초기 엘리트이론가들은 통치계급, 또는 정치엘리트를 통칭해 정치계급이라고 불렀다. 즉 공동선의 구현자로서의 정치인이란 긍정적인 의미도 내포돼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정치계급은 냉소적인 말이 돼버렸다. 미국에서도 정치인을 비하할 때면 정치계급이란 표현을 곧잘 쓴다. ‘평생 정치 속에서 살면서 스스로 땀흘려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는 특권층’이 정치계급이다.
한국사회에도 정치계급이 있을까. 없다고는 말 못한다. 요즘같은 선거철엔 적어도 ‘정치계급 증후군’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현상들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정치계급의 특징은 엄밀히 말하면 정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이념이나 대의명분의 실천수단으로서의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여야 모두 공천 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공천에서 탈락했다고 해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고 일부 인사들은 당까지 만들 태세다. 언필칭 국민 또는 지역구민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지만 목적은 단 하나 정치를 계속하기 위해서다.
물론 출마와 창당은 자유고, 원인제공자의 ‘과욕’에도 큰 책임이 있다. 특정인을 지칭해서 안됐지만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총재가 이번 공천과정에서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50년 한국 야당사를 관통해 온 ‘포용의 정신’이다.
야당은 언제나 자기들끼리 싸웠다. 조병옥(趙炳玉)의 구파와 장면(張勉)의 신파로 나뉘어 싸웠고 유진산(柳珍山)의 진산파와 반(反)진산파로 갈라져 싸웠다. 그러나 한쪽은 언제나 다른 한쪽을 껴안고 갔다. 적어도 90년 3당 합당으로 양김씨가 완전히 갈라서기전까지는.
원인제공자의 책임을 거론한다고 해서 일부 정치인들의 요즘 행태가 이해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정치만 계속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세(勢)만 불릴 수 있다면 전력(前歷)도 색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라도 지역의 맹주를 찾아가 무릎을 꿇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기표(張琪杓)씨가 자신의 당을 ‘무지개연합’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다. 무지개 색깔처럼 7인7색의 영롱한 무지개당의 탄생을 이제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실로 정치계급의 전형이다. 달리 표현하면 정치 사유화(私有化)의 극치다. 정치계급은 정치가 언제나 자신의 포켓속에 들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던가.
우리는 어쭙잖은 계급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계급화(계층화)는 사회적 병리(病理)의 실체를 집단화하고 형상화해 줌으로써 개선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투쟁의 욕구를 부추기는 이점이 있다. 정치계급도 예외는 아닐 터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무한권력은 그 자체가 죄악’이라고 했다. 정치계급 그 자체가 죄악인 것처럼 느껴지는 선거철을 우리는 다시 맞고 있다.
이재호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