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비디오 작가 빌 비올라(미국)의 ‘지식의 나무’를 보기 위해선 전시장 내부에 별도로 마련된 어두운 방에 들어가야 한다. 이 방의 입구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큼 좁다. 한 번에 한 명씩만 관람이 가능하다.
관객이 입구에서 한 걸음 떼어놓는 순간 정면에 보이는 스크린에 뭔가 변화가 생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나무의 새싹이 비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벽에 가까이 가는 동안 나무는 아주 크게 자라나서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태어나 자라서 늙고 죽는 인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내용.
▽멀티미디어+인터랙티브 작품들〓97년 만들어진 이 작품은 관객이 입구로 들어가지 않으면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관객의 행위와 작품의 표현내용이 서로 연결돼 영향을 주고 받게 한 ‘인터랙티브(Interactive)’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많은 표현매체와 과학기술이 사용됐다. 비디오필름과 스크린 뿐 아니라 관객의 움직임을 살피는 컴퓨터센서, 화면제어장치 등이 사용됐다. 기존 회화작품처럼 캔버스와 물감 등 단순한 표현매체(미디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재료와 기술 등 복합매체(멀티미디어)를 사용한 것이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해 ‘인터랙티브’ 효과를 추구하는 ‘멀티미디어+인터랙티브’ 작품이 세계미술계에 뚜렷한 경향을 이루고 있다. 빌 비올라 외에 제프리 쇼(호주), 로렝 미농노(프랑스) 등도 이같은 작품을 발표해온 유명 작가들이다.
제프리 쇼는 전시장 내부에 수많은 단어들이 터널처럼 입체영상으로 떠오르는 ‘함께 동굴 만들기’를 발표했다. 글자의 터널 속에 인형이 나타나 관객의 몸짓에 따라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인다. 컴퓨터전문가 브렌드 린터만(독일)과 비디오작가 아그네스 헤제듀스(헝가리)가 그의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미농노는 비디오작가 크리스타 소머르(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삶의 공간’을 발표했다. 관객이 전시되고 있는 이 비디오작품 화면 속에 등장하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멀티미디어와 인터랙티브를 이용한 작품 경향이 뚜렷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9월부터 열리는 ‘미디어시티 서울 2000’에서도 국내외 멀티미디어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송미숙 전시총감독은 “현재 작가와 작품을 선정 중에 있다”면서 인터랙티브가 강조된 작품이 여럿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설치작가 이용백은 과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3월경 관객의 숨쉬기에 따라 작품모양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작품을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퓨전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왜 멀티미디어+인터랙티브인가?〓기존 미술품과는 감상 과정이 다르다는 점이 이런 작품들이 유행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전에는 작가가 작품을 이미 완성한 다음에 전시했다. 관객은 그 결과물만을 볼 수 있었다. 반면 이같은 작품들은 ‘완성품’이 아니다. 관객의 몸짓에 따라 내용이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다 다른 내용을 볼 수도 있다. 관객은 작품의 내용 형성에 능동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때로는 작가가 아니라 관객 자신이 작품내용을 만든다는 느낌을 준다. 보다 주체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제는 관객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어가 내용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송미숙 총감독은 “인터랙티브 작품을 통해 작가들은 예술품을 접할 기회와 동기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관객들이 만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학과 예술의 결합〓컴퓨터와 인공지능 등의 도움없이는 이같은 작품을 만들기 어렵다. ‘미디어시티 서울 2000’에서도 가상현실 연구 전문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영상미디어연구센터 김형곤 소장과 고희동 책임연구원을 초빙했다. 이들은 참여작가들이 결정되면 그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제공할 계획이다. 김형곤 소장은 “과학은 작가들에게 더 많은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미디어시티 서울 2000’ 박규형 전시팀장은 “멀티미디어를 이용해 인터랙티브 효과를 강조한 작품은 기존의 작품과는 다른, 신선한 느낌 때문에 당분간 유행할 것”이라며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표현매체보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작가들의 영원한 화두는 표현방법이 아니라 ‘예술성’이라는 주장이다.
▼ 키워드/테크노에틱스 ▼
‘테크노에틱스(Technoetics)’는 정신적인 부분과 기술적인 부분의 결합을 상징하는 말.
이 용어에 대해 미디어 아트 작가 로이 애스콧(영국 웨일즈대 교수)은 “인간이 물질과 기술적인 것에 치우치는 것을 피하고,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해 균형있게 발달해가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내용을 담은 새로운 표현매체(미디어)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
그는 ‘테크노에틱스’를 추구하면 기계가 중심이 된 컴퓨터 미디어의 ‘건조함’을 극복하고, 인간의 냄새가 나며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촉촉한’ 미디어(Moist Media)를 개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