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는 도중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있어. 행동이 아닌 생각을 담은 영화 말이야.”
프랑스의 에릭 로메르 감독 자신이 했던 이 말처럼 그의 영화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표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최근 극장을 거치지 않고 곧장 비디오로 출시된 그의 ‘가을 이야기’(1998년) 역시 마찬가지. 중년 여성의 남자 찾기를 소재로 한 코미디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에 로메르 감독은 별 관심이 없다. ‘가을 이야기’는 관계의 결과보다 관계 맺기의 과정, 행위보다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 영화다.
로메르는 고전적인 영화 서술구조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화의 혁명을 일으킨 50,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주자 가운데 생존해 있는 마지막 감독. ‘가을 이야기’는 ‘여섯개의 도덕 이야기’ ‘희극과 속담’ 등 시리즈로 영화를 만들어 온 그가 90년대 들어 만든 ‘계절 이야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과부 마갈리(베아트리스 로망 분)는 포도원을 운영하며 “장사가 아니라 장인으로 일한다”고 자부할 만큼 정성을 쏟는 40대 후반의 중년 여성. 그러나 성장한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외로워하는 그를 위해 친구 이자벨(마리 리비에르)과 아들의 연인 로진(알렉시아 포탈)은 남자를 소개해주려고 애 쓴다. 이자벨과 로진이 각각 구해온 남자 들과 마갈리는 이자벨의 딸 결혼식장에서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할리우드식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배경 음악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대사가 많은 이 영화가 낯설 수도 있다. 그러나 갈팡질팡 오가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는 여정은 제법 흥미롭다.
중년의 남녀는 서로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슬쩍 슬쩍 탐색해보며 성적인 긴장상태에 놓이고, 우연과 오해의 연속 때문에 관계가 엇나가자 애가 탄다. 등장인물들의 묘한 질투와 일탈의 충동, 욕망이 관계를 어떻게 달라지게 만드는지에 대한 고민은 솔직하지만 아이러니컬하다.
로메르 감독은 영화에서 마갈리의 로맨스가 거의 성사되는 듯한 단계에 이르면 어김없이 오해의 변주를 통해 계속 아슬아슬한 긴장을 빚어낸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마갈리는 오해를 풀고 한 남자와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만을 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또다시 사소한 오해로 행복을 놓쳐버릴지도 모를 일. 만일 마갈리가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이 짓궂은 노대가는 웃으며 “그게 인생”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성베네딕도 시청각 출시. 판매용 2만3000원. 02-2279-7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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