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 시장은 이미 알려진 대로 존 그리샴이나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대중소설가들이 석권한 지 오래다.
그래서 문학성으로 평가받는 작가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일은 좀처럼 없다. 거기다 미국 시장은 번역된 소설에 유난히 냉담하다.
그런데도 세계의 독자들이 미국의 대중소설에 중독되어가는 사태는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 지배 못지 않게 약오르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영혼의 집’ ‘에바루나’로 알려진 이사벨 아옌데의 신작 ‘운명의 딸’이 화제다.
작년 봄 스페인에서 발간되었고 지난 연말 미국에 상륙하여 꾸준히 인기를 모으면서 지난달부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아옌데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대번에 작풍이 바뀐 걸 알 수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상적 리얼리즘이 사라지고 그 대신 파노라마 스타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플롯의 기교도 사라지고 한 가련한 여주인공의 자아찾기 고생담이 펼쳐진다. 그러니 쉽게 읽힌다. 거기다 아옌데의 아름다운 문장, 매끄러운 이야기 솜씨로 쉽사리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소설은 드러내놓고 신파조로 시작된다. 19세기 중엽 영국령 칠레. 비누상자에 담겨 한 영국인 무역상의 집 문 앞에 버려진 여자 아기. 주인공의 이름은 엘리자. 아이는 교양있는 영국 처녀처럼 키워지지만 결국은 야릇한 성적 매력이 넘치는 빈민 출신 안디에타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청년은 캘리포니아에서 황금 채굴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풍문에 엘리자를 뒤로 한 채 떠난다. 뒤늦게 임신한 사실을 알게된 엘리자는 남자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에 오르고, 험한 뱃길에 유산을 하게된다. 거기에 동양의 도사가 있다. 중국에서 노예로 팔려왔지만 지혜로운 사람인 선실 요리사 타오 치엔은 신비의 한약으로 그녀를 소생시킨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엘리자는 남자옷으로 변장하여 애인을 찾아나서지만 쉽지 않다. 중국인 창녀들의 뒷바라지에 나선 치엔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남자 행세를 하지만 초기 캘리포니아의 거친 환경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갖은 고생 끝에 그녀가 얻은 것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확신, 그녀는 남자옷을 버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은 뉴욕 타임스로부터 페미니즘의 형상화가 평면적이라는 비판적 서평을 받았다.
그러나 여성의 주체적 삶이라는 주제에다 다인종, 다문화 시대에 대한 풍부한 정보제공, 아름답고 대담한 여주인공이 묘한 청년과 벌이는 로맨스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대중성에 민감한 오프라 윈프리가 뒤늦게 이달의 책으로 추천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이영준(하버드대 동아시아지역학과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