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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홍사종/밀실이 좋은 사람들

입력 | 2000-03-19 20:00:00


우리 학교 교직원 식당은 직원과 교수는 물론 조교 대학원생들도 이용가능하게 개방된 곳이다. 그런데 나의 눈에 좀 특별나게 비친 것은 식당을 이용하는 이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행태다.

쿠폰(식권)을 사고 식판에 밥과 반찬을 스스로 필요한 만큼 담아낸 이들이 선착순으로 선점해 가는 자리가 특이하게도 구석자리부터가 아닌 한가운데부터라는 점이다. 순간 나의 고정관념화된 인간의 식사습관에 대한 인류학적 가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의 관찰에 비친 식당을 찾는 사람들의 자리찾기 습관은 사방으로 개활된 중심부 자리가 아닌 차단된 벽면에 기댄 가장자리부터가 먼저다. 커피숍에 들어가도 사람들은 가운데보다 구석자리를 왠지 아늑하다는 이유로 선호한다. 먹을 때 한쪽 벽면이라도 타인과 차단된 곳이어야 비로소 안심되고 편안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바뀌어가는 '구석자리'선호▼

그렇다면 구석이 편안하고 가운데 자리가 불안한 사람들의 이 무의식적 식사 관습의 기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 자연 앞에서 한없이 나약했던 원생인류 시절부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방에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개활지 한가운데서 포획한 먹잇감을 자신있게 먹어치울 우리의 조상인 원인(猿人)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먹잇감을 끌고 삼면이 가려진 컴컴한 동굴 속, 아니면 골짜기에 등을 의지하며 식사하던 그들의 모습은 상상이 간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맹수로부터 먹잇감을 지키는 행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포획한 먹잇감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에도 기인했을 것이다.

그 원생인류의 불안과 욕심이 수만년의 진화과정에도 변하지 않고 유전적 형질로 고착된 것이 바로 인간들의 식사자리 찾기 습관이다. 지금까지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숱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 현생인류로 발전한 우리들 속에 남아있는 이 무의식적 행동양식은 쉽게 소멸될 관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이 인류학적 상상력과 믿음은 최근 대학 직원식당에서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진화가 일어난 곳은 비단 교직원식당뿐만 아니라고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패스트푸드점, 카페 등은 구석자리, 가운데자리가 따로 없다는 것이 아내의 설명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선호하는 카페나 음식점의 조명이 밝다는 점이다. 대낮처럼 환한 것을 뛰어넘어 아예 밖에서도 안이 보이게 투명유리로 꾸며놓은 곳도 많다. 그 여파에서인지 덩달아 기성세대 애용 음식점이나 커피숍의 조명도 밝아지기 시작했다.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시대로 표현되는 정보화사회가 촉발시킨 변화의 급류 속에서도 불변할 것 같던 이 인간의 무의식적 유전적 형질이 새로운 형태의 인류의 의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두컴컴한 밀실지향의 식사 관습이 빛과 여유의 관습으로 바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밀실지향의 인테리어로 일반 손님을 끌던 대중 식당과 카페들도 밝고 환한 개방형 인테리어로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고 한다.

▼정치인 밀실지향 언제까지▼

그런데 이 진화의 조용한 바람과 반대로 가는 특이 인류가 있어 식당의 밀실과 구석자리 지향의 관습은 당분간 없어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 특이 인류가 소속된 집단은 금권과 정치권력을 쥔 졸부 무리와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정치인 집단이다. 그들이 끼리끼리 즐겨 찾는 고급식당에는 예외 없이 사방이 벽면으로 아늑하게 가려진 밀실이 많다.

이들이 고급 식당의 밀실을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정략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금력과 권력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에 늘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두 번째는 쟁취된 금권과 권력을 타인과 나누기 싫은 독점욕구의 무의식적 반영이 방어본능의 벽면의지형 밀실지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굴 속에서 혼자 포식하던 원생인류의 불안과 독점적 욕망의 유전적 형질을 가장 잘 간직하고 보존한 집단이 작금의 졸부와 정치인들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밀실에서 이루어진 공천과 정치를 민주사회라는 개활지로 끌어내려는 시민단체의 외침도 이들에겐 우이독경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진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 새로운 특이 인류라는 종(種)의 멸종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홍사종 (숙명여대 교수·문화관광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