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또는 한국인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그 유래가 짧지 않다. 1920년대 이광수의 ‘정신개조론’, 1960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외국신문의 경멸어린 보도, 1990년대말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등.
저자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필치로 한국 한국인의 문제점을 파고 든다. 하지만 비판 자체보다는 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발전을 막는 정신적 요소와 무엇이 우리의 잠재된 에너지인지에 천착했다.
사회병리로 심심찮게 들먹여지는 ‘양심의 실종’이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도발적 반문부터 먼저 들어보자.
“실종은 있었던 것이 없어졌을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에게 인간적 양심이 키워졌고 시민적 덕성이 심어졌던가?”
저자는 한국인에게 개인행위 최후의 심판자인 양심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책임감 있는 귀족)’ 같은 근대 시민사회 윤리도 체화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이렇게 한국인의 의식, 정신문화를 문제삼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문명창조의 제1요소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신문화는 왜소해도 기술이 앞서서 선진민족이 된 사례가 역사상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새 밀레니엄의 도약을 위해서는 우선 한국인의 의식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완성’. 성숙한 개인이 모였을 때 비로소 성숙한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때의 개인은 이기적 개인이 아니며 사회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완성되는 개인이다.
또 저자는 최소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도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근대적 가치조차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나라에서 포스트모던 운운해봐야 혼돈만 더할 뿐이라는 것.
‘한국은 과연 가능성이 있는 나라일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우리들의 의식을 고쳐나간다면 ‘중선진국 정도는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이성적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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