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중인 프랑스 작가 파스칼 브뤼크네르. 최근 국내에 소개된 ‘순진함의 유혹’에서 사회적 보호체계 속의 개인이 갖는 무책임과 퇴행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이번에는 어른을 위한 ‘느와르(Noir·암흑) 동화’를 썼다. 제목이 사뭇 자극적이다.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작가정신 펴냄). 표제작과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 등 두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식인귀’ 이야기의 주인공은 말끔한 신사로 손색이 없는 발튀스. 그러나 지구상에 은밀히 퍼져 있는 식인귀 종족의 한사람이다.
발튀스는 자신에게 핏줄로 전해진 ‘악습’을 고쳐보고자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에 가입하는 등 온갖 애를 쓰지만 잘 되지 않는다.
상대가 기꺼워하던 말던 어쨌거나 아이에 탐닉하는 식인귀와 달리 ‘화학자’ 이야기의 주인공 폴콘은 아이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외롭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그로서는 어린이의 밝고 행복한 웃음이 마냥 괴롭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우연히 얼굴이 안보이게 만드는 특수 도료를 발명하게 되고, 하교길에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만을 골라 얼굴이 사라지게 만든다.
소개한 줄거리는 작품의 일부분일 뿐이다. 발튀스의 기행을 제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하인 카르피오치의 온갖 희한한 궁리나, 납치한 아이를 어쩌지 못해 끙끙대는 폴콘의 모습은 폭소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웃음 끝에 독자는 벽에 부닥친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식인귀는 세기말 자본주의의 정글에서 타인을 삼키려 하는 우리 자신’ 이라거나 ‘획일화된 사회 속에 내재한 차별의 문제’로 보는 외지의 서평을 참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보아넘기기 힘든 ‘텍스트 해석의 개방성’이 두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김난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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