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 -영원히 젊은 시인의 초상
생물학적 젊음과 다른 차원에서 시적인 젊음이란 무엇일까? 최근 ‘문학과사회’, ‘문예중앙’, ‘문학동네’ 등의 문예지 봄호에 일제히 발표된 허만하의 신작시편들을 읽어내려 가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진정한 문학적 젊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가 지난 해 가을, 고희를 3년 앞두고, 30년만에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를 발간했을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세기말 현대시사를 마감하는 장관이자, 부박한 문학적 속도전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풍경은 한 비평가에 의해 “지난 천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는 표현을 얻는다.
시집에 대한 비평으로는 이례적인 이 표현은 물론 일종의 ‘수사’이겠지만, 그것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 시집 이후, 30년의 세월 동안 시인이 묵묵히 축적해 온 단단한 지성의 향취, 문명이 뿌리내리지 않은 오지까지 찾아가는 다채로운 여행 편력, 자연과 유적에 투사된 시원적 상상력, 견고한 절대 고독의 정서, 시적인 현대성에 대한 갈망 등이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에 은은하게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는 수직…’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가 한순간에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세기말의 시단을 수놓았던 것이다.
시인은 그 폭발을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새 봄에 한꺼번에 신작들을 발표하고 있다. 과연 허만하의 신작시들은 ‘비는 수직…’의 성과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령, ‘아득히 저무는 들녘 끝에 눈부신 외로움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미루나무 밑 캄캄한 토사층을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는 목마름의 청렬한 뒤척임을 본다’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에서 묘사되는, 겨울나무로 표상되는 절대 고독의 정서는 얼마나 청아한가? 그 고독의 정서는 센티멘탈리즘을 탈피하여, 의미의 골이 깊은 시적 표현을 통해 하나의 미적 에피퍼니(현현·顯現)에 이른다. 그래서 시인은 ‘단아하게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섬 그늘진 암벽에 주라기의 소금처럼 아침 노을이 묻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잔잔한 다도해가 사막의 다른 얼굴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검은 염소떼와 미루나무)고 ‘인식의 전환’을 노래하는 것이다.
다도해에서 사막을 연상하는 시인은 또한 ‘썰렁한 초겨울 논두렁 끝에 외로운 눈부심처럼 수직으로 서 있는 잎 진 한 그루 미루나무’를 통해, 쓸쓸히 사라진 노인을 연상한다. 그러고 보면, 수직으로 서 있는 그 미루나무는 시인 자신의 비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미루나무 밑을 흐르는 ‘목마름의 청렬한 뒤척임’은 바로 시인 자신이 오랜 세월동안 간직해온 시적 욕망의 메타포일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왜 그토록 시인이 겨울나무를 노래했는지를. 외롭게 수직으로 서 있는 청정한 겨울 나무는 ‘언제나 싱싱한 에스프리를 지닌 신인으로 있고 싶습니다’(‘비는 수직으로…’ 自序))며 시적인 젊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시인의 초상이다.
외로움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법. 이제 시인의 외로움은, ‘시원한 동태국에 고춧가루를 풀어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말아먹고 있는 중년 사나이의 외로운 숟가락질이 슬프다’(세계는 숨기고 있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타인에 대한 연민과 조우하게 된다. 수직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로 표상되는 절대 고독이 ‘세계는 얼마나 많은 배고픔을 숨기고 있는가’라고 표현되는 인식의 세계와 만나서 형성될 또 다른 시적 갱신이 궁금해진다. 그 갱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시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변방에 있으면서 중심에 편입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자유, 정신의 자유, 그 끝을 지키고 싶습니다’고 말할 수 있는 유목민적 자존이 온전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그의 시적 성가가 높아져 갈수록, 스스로 그 세계로부터 탈주해야 하는 모순된 운명에 처한 셈이다. 그 운명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는 영원히 젊은 시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정말 젊은 시인이다.
권성우(동덕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