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2시경 각 언론사 경제부에 정몽구(鄭夢九·MK)회장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측으로부터 긴급 전화 연락이 왔다. 현대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오늘 오후 2시반부터 중대 기자 회견을 열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자회견장인 조선호텔에 나타난 사람은 정몽구회장 측근인 정순원(鄭淳元)현대자동차 부사장. 정부사장은 “정몽구회장의 현대그룹 경영자협의회장직 면직을 발표한 현대 구조조정본부의 24일 발표를 취소한다”고 밝힌 뒤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인사명령서 원본이라는 문서를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정부사장은 이어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아무런 대답도 않고 10분만에 급히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현대 구조조정본부가 정몽구회장의 면직을 발표한 24일 오후 5시로부터 불과 45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정몽구회장이 25일 오전 10시에 정명예회장을 방문해 한시간만의 설득 끝에 오전 11시경 정명예회장으로부터 사인을 받아냈다고 MK측은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몽헌(鄭夢憲·MH)회장측 설명은 전혀 다르다. MK측의 반격은 정명예회장의 진심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MH의 한 측근 인사는 “정명예회장이 결재한 괴문서가 MK측에 나돈다는 소문이 25일 밤부터 나돌아 이를 확인하기 위해 26일 오전 MH와 김윤규 현대건설사장, 김재수 현대그룹구조조정본부장 등이 정명예회장을 방문했으나 정명예회장은 ‘그런 결재(MK쪽이 주장하는 인사명령 번복)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고 주장했다.
MK를 현대 경영자협의회장에서 물러나게 하는 24일의 충격적인 발표 이후 정명예회장이 25일 오전 10시반 MK MH 등 두 아들을 불러 식사를 같이 할 때만 해도 현대그룹은 정상을 찾아가는 듯했다.
MK는 아버지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했다. MK는 24일 밤에 과음을 했는지 술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 참석자는 전한다. MH 역시 24일 밤11시25분 만취한 상태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 집에 들어가는 것이 취재기자에게 목격됐다. 그러나 25일 오찬 때에는 전날 과음을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밝고 의욕에 찬 모습이었다.
식사 내내 정명예회장은 별다른 말이 없었고 형제간에도 한마디 대화가 없었다는 것이 배석한 사람의 전언. 말은 없었지만 모임 그 자체로 메시지 전달은 충분했다. 24일 구조조정본부의 발표는 정명예회장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니 이대로 시행하고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는 분위기였다고 MH쪽 인사는 전했다.
정명예회장은 25일 오전 7시 계동 본사 15층 명예회장 집무실에 나와 MH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았다. MH에게 힘을 실어 주고 분란에 휩싸였던 현대를 빠르게 안정시키려는 정명예회장의 의도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러나 현대그룹에서 빚어진 ‘왕자의 난’은 다시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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