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은 죽는다.’
현대 오너 회장들의 ‘대권’ 싸움 틈새에 낀 전문경영인들도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문경영인들이 몽구(MK)-몽헌(MH) 라인으로 나뉘어 오너 싸움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은 경영자적 자질보다는 오너에 대한 충성심이 결정적 생존비결로 통하는 ‘한국적 전문경영인’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26일 오전 열린 정몽구회장측 인사들의 대책회의. 이 자리에는 평소 MK라인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박세용 인천제철회장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박회장은 왕회장(정주영명예회장)의 직계로 몽구 몽헌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던 인물. 그런 그가 MK라인으로 깜짝 변신한 것이다.
박회장의 경우 ‘중립은 죽을 수밖에 없는’ 현대 특유의 그룹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평. 박회장이 올해 초 그룹구조조정본부장에서 현대차회장으로, 다시 인천제철회장으로 ‘전전’하는 신세가 된 것도 그가 MK나 MH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풀이하는 사람이 많다. 중립 인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뒤’를 봐주지 않는다는 것. 한편으로는 작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당시 이익치 회장과 갈등을 빚은 것도 이번 ‘변신’의 동기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MK측 ‘재반격’ 기자회견을 맡은 정순원 현대자동차 부사장은 원래 현대그룹의 싱크탱크인 현대경제연구원 부원장 출신. 그는 몽구회장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때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MK와 인연을 맺었다. 정부사장과 이계안 현대자동차사장은 몽구회장의 경복고 후배. 이사장은 원래 그룹내 대표적인 기획통이었으나 구조조정을 지휘하다 현대자동차로 분가할 때 몽구회장을 따라왔다.
몽헌회장은 건설과 전자 등 자신이 관할하는 주력 계열사를 통해 두터운 인맥을 형성해 놓은 것이 이번 경영권 분쟁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특히 대북사업을 벌이면서 그룹내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이익치 증권회장 김윤규 건설사장 등을 자기 사람으로 확보했다. 왕회장의 비서 출신인 이회장과 대북사업을 총괄하면서 수년째 왕회장을 지척에서 보좌한 김사장, 두사람의 존재는 대권분쟁에서 몽헌회장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이회장은 이번 인사파동의 단초로 작용했으며 몽구회장측이 발표한 자신의 경질 인사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확실히 MH라인에 섰다. 김윤규사장은 왕회장의 신임을 무기로 3부자 오찬에도 참석하는 인물로 대북사업을 함께 하며 가까워진 몽헌회장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몽헌회장측 인물로 분류되는 김영환 현대전자 사장은 지난해 LG반도체를 인수한 빅딜 이후 뇌수술을 받아 현재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상태. 따라서 이번 경영권 분쟁에 끼어드는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 오히려 행운(?)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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