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어오르는 열정을 자기 안에 가둔 채 주춤거리다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유약한 소년(‘투 다이 포’), 어둡고 낯선 감옥에서 공포에 질려 시들어가던 가련한 사형수(‘리턴 투 파라다이스’)를 기억하는지? 아니면 ‘유턴’에서 폭발할지도 모르니 건드리지 말라는 듯 ‘TNT’라는 글자를 머리 뒤에 새겨넣은 덜 떨어진 건달은?
또래의 젊은 배우들과 비교해보면 와킨 피닉스(Joaquin Phoenix·26)는 어딘지 좀 유별난 데가 있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맡은 배역들도 한결같이 정상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음침한 외곬으로, 비비 꼬이고 뒤틀렸지만 소외되고 상처받기 쉬운 아웃사이더의 이미지. 이 때문에 그는 주연은 어렵지만 출연하는 영화마다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새겨넣는 ‘빛나는 조연’이었다.
와킨 피닉스는 23세 때 약물 중독으로 요절한 영화배우 리버 피닉스의 동생. 그는 ‘90년대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만큼 반항적인 청춘을 상징했던 형과는 이미지가 한참 다르다. 그러나 어떤 제도에도 자신을 맞춰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 부적응자로서의 묘한 매력을 풍긴다는 점에서 이들 형제는 닮은 구석이 있다.
와킨 피닉스는 성장과정부터가 독특하다. 히피였던 부모에게 이끌려 와킨과 네 남매는 남미를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리버(River), 레인(Rain), 리버티(Liberty), 서머(Summer) 등 남매들의 이름에서부터 히피 기질이 물씬 풍긴다. 와킨도 자연에서 따온 이름을 갖고 싶어 네살 때 ‘리프(Leaf)’로 개명, 열다섯살 때까지는 ‘리프 피닉스’라는 이름으로 TV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거리 공연을 해서 생활비를 벌곤 하던 다섯 남매는 모두 연기에 재능이 있었고, 장남인 리버를 필두로 모두 TV에 진출했다. 현재에도 리버티와 요절한 리버를 제외한 세 남매가 모두 영화배우로 활동 중이다.
와킨 피닉스는 1982년부터 TV에 얼굴을 내밀다 1986년 ‘스페이스 캠프’로 영화에 데뷔했다. 1989년 갑자기 TV와 영화 출연을 그만두고 영화 세 편의 출연료를 전부 자선단체에 기부한 뒤 아버지와 함께 멕시코 여행을 떠날 만큼 괴짜 기질이 만만치 않다. 93년 형 리버 피닉스의 죽음으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그를 형의 그늘에서 끌어내어 제 몫을 하는 배우로 자리잡게 한 영화는 95년 ‘투 다이 포’. 야심만만한 앵커지망생인 니콜 키드먼에게 빠져 살인을 저지르는 소심한 소년 역을 맡아 호평받았다.
고정된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사람의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은 와킨은 최근 ‘마이애미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정직한 이야기,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말했다. 애처롭고 아름다운 노래로 그 아름다움에 압도된 다른 동물들까지 다 죽게 만든다는 전설 속의 새 ‘피닉스’처럼 그가 언젠가는 찬란하게 비상할 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와킨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작 ‘글라디에이터’에서 젊은 폭군 코모더스 역으로 올 6월 국내 영화팬들을 찾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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