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가족 동료와 연락이 끊긴 채 6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한 네팔인 여성 노동자에게 한국은 분노의 대상일 뿐이었다.
93년11월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무려 6년이 넘는 기간을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18일 동료들과 극적으로 상봉한 찬드라 쿠마리 구릉(44).
경제정의실천불교연합(경불련)과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29일 그의 실종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정부 당국과 국민에게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에 보다 큰 관심을 가져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찬드라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92년2월. 고향 네팔에 부모와 7명의 형제가 있던 30대 중반의 찬드라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찬드라가 섬유공장에서 일하며 받은 돈은 월 45만원 남짓. 네팔보다 5배 가량 높은 액수였다. 고된 일과와 차디찬 시선을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견뎌나갔다.
찬드라의 ‘코리안 드림’이 산산조각난 것은 93년11월. 서툰 한국말로 음식점에서 식대문제로 다투다 경찰로 넘겨졌다. 찬드라는 ‘네팔 사람’이라고 밝혔지만 경찰은 문맹인데다 횡설수설하며 행색이 초라한 찬드라를 ‘내국인 정신질환자’로 판단했고 ‘1종 행려병자’로 분류해 서울 C정신병원으로 넘겼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통역을 부르는 등의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그를 한국사람으로 파악했던 것. 더구나 당시 대부분의 네팔인은 여권을 공장에 맡기는 것이 관행이어서 찬드라는 신분증은 물론 연락처와 돈마저 기숙사에 놓고 와 꼼짝없이 ‘행려병자’로 몰렸다.
‘행방불명’된 지 열흘이 지나 네팔인 동료들이 실종신고를 냈지만 찬드라를 행려병자로 판단한 서울 동부경찰서에선 자신들이 정신병원으로 보낸 찬드라를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찬드라를 수용한 병원측은 찬드라의 이름을 영문(Chandra Kumari Gorum)으로 적어 출입국관리소에 공문을 보냈지만 관리소측은 “그런 이름은 등록돼 있지 않다”고 답변해 왔다. 관리소에 등록된 그의 이름은 ‘Chandra Kumari Gurung’이어서 병원측이 의뢰한 이름과 철자가 몇 개 달랐기 때문. 이렇게 해서 ‘실종의 6년 비극’이 시작됐던 것.
찬드라는 수용됐던 병원의 한 의사가 우연히 네팔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온 동료 의사에게 연락하고 이 소식이 한국내의 네팔인 공동체에 알려지면서 18일 극적으로 동료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고향의 찬드라 가족은 그가 이미 숨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이날 회견에 참석한 재한 네팔공동체 총무 시토우라(32)는 “우리 동남아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백인 등 다른 외국인과 똑같이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현재 한국에는 2000여명의 네팔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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