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볼로냐 국제 어린이 도서전’이 막을 내리던 1일. 벨기에의 한 출판사 사장은 한국의 한 저작권 에이전시 대표에게 여러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한국인의 명함 7장이 붙어있는 종이였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계약을 하려는 한국인이 너무 많아 어찌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J출판사에서는 두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온 사람은 자기네 출판사에서 이미 다른 사람이 다녀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탈리아의 볼로냐 도서전시장은 그야말로 한국인의 물결이었다. 가는 곳마다 한국인이었다. 이번 도서전을 찾은 한국의 출판 관계자는 250여명. 한국 출판인들의 지대한 관심탓일까.
그렇지 않다. “사전 준비도 없이 와서 마구잡이로 계약을 하려 한다. 어느 한국인 출판사가 계약한다고 하면 뒤쫓아가서 계약 경쟁에 뛰어 든다”는 한 출판인의 말처럼. 문제는 저작권 계약에 있어 한국인끼리의 경쟁으로 선인세(先印稅)만 올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과당 출혈 경쟁이다.
한 출판사의 어린이도서팀장 최모씨는 “서양의 어린이 책이라고 해도 좋은 책은 제한되어 있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뛰어들다보면 올 연말쯤엔 질 낮은 외국 어린이 책이 국내 시장에 마구 쏟아질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출혈 경쟁은 어린이 책뿐만 아니다. 최근엔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여성 변호사의 자서전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남아’(고단샤)의 저작권 계약을 놓고 출혈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야쿠자 두목의 아내에서 호스티스, 그리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담은 책. 한국에서 50여개의 출판사가 달려들어 현재 선인세가 수백만엔을 호가할 정도라고 한 관계자는 전한다. 물론 충분히 눈독을 들일 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책을 읽어보고 계약 경쟁에 뛰어든 출판사는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칸느다 베를린이다 베니스다해서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 마다 나타나 국제 시세의 몇배나 되는 돈을 주고 마구잡이로 외화를 들여왔던 영화계에 이어 출판계 마저 ‘떼거리 저작권 사냥’에 나서는 것은 아무래도 볼썽 사나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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