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사이에는 서구민주주의 이론이 해방 직후 미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의 고종 때이던 1876년 개항을 앞뒤로 한 시점에서, 특히 ‘한성순보’를 통해 정당과 선거에 대한 이론이 중국과 일본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했고,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과 ‘정치학’에 이르러서는 서구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관한 이론은 거의 모두 소개됐다. 더구나 1905∼1907년에는 ‘국가학’ ‘헌정요의’ ‘정치원론’ 등의 책들이 잇달아 출판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부분류법과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부터 토크빌의 시민민주주의론에 이르기까지 서양정치학의 많은 부분들이 소개됐다.
▼전혀 개선되지 않은 정당의 형태▼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정당과 선거를 못마땅히 여기는 흐름이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의 한 논설은 정당을 ‘이기적 충동심에서 권력을 다투는 파당’ 정도로 깎아내렸으며, 유길준은 선거의 부정적 측면을 적지 않게 지적하고 국민대중이 충분히 교육되기까지는 투표권을 누구에게나 주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국회라는 말 자체는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국회는 정책과 정견이 표현되고 토론되는 곳이라는 해석이 덧붙여졌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이 나라를 망치는 요인이라는 비판도 정치풍자 소설 ‘금수회의록’의 작가로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안국선(安國善)의 ‘정치지도자론’ 에서 이미 충분히 제기됐다. 영어의 public servant를 ‘공용인(公用人)’이라고 번역하고 나서, “조정의 녹을 먹는 자들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에서 볼 때 국민의 공용인이므로 사리사욕과 당파심을 버리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역설함과 아울러, “정치지도자들이 부정부패한 즉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므로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자 아니 하니 어찌 국권이 지켜질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왕조 말기에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는 서양의 민주주의 정치사상과 이론이 폭넓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했기에 1910년 망국으로부터 아홉 해밖에 지나지 않은 1919년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됐을 때 왕정복고를 꾀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고 쉽게 민주공화제를 받아들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민주정치의 운영에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는 까닭을 ‘민주주의 도입의 역사가 짧았던’ 데서만 찾는 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16대 국회의원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 분위기는 더욱 저열해지고 혼탁스러워지고 있다. 한말의 서양정치학 수용자들이 이미 걱정했던 일들이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한성순보’ 논설이 비판했던 그대로 정당은 ‘이기적 충동심에서 권력을 다투는 파당’의 수준에서 조금도 나아진 점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지역감정에 호소해 국회에서 몇석이나마 건지려는 얄팍한 계산에서 급조된 민국당은 아예 논외로 하고, 다른 정당들을 이모저모 뜯어보아도 전근대적 파당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승리제일주의’에 매달려 역겨운 정쟁을 벌일 뿐이다. 자연히 선거는 불법과 타락으로 점철되어 있어, 과연 이러한 선거를 거친 뒤 성립될 16대 국회가 국민의 진정한 대의기구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것인지 의문이 앞선다. 더구나 병역 납세 전과 등의 논란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진 데다가, 이미 만연된 ‘반(反)국회적’ 사회심리 앞에 위신이 크게 훼손돼 입법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시민운동'구름속 한줄기 빛▼
그렇다고 해서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치개혁에서 해답을 찾게 되는데, 그 싹이 보인다는 데 희망을 갖는다. 그것은 시민운동의 확산이다. 시민운동은 적지 않은 논란 속에서도 국민의 정치의식 개혁에 이바지했으며 정치지도자들과 정치권에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식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선거 분위기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거기에는 기존의 낡은 틀과 관행이 깨지면서 발생하는 탁음이 섞여 있다는 고무적인 현상도 엿보인다. 유권자들이 우선 기권하지 말고 투표장에 가 지연 학연 집단이기주의 등에 얽매이지 말고 정말 현명하게 투표하기 바란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