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1916∼1956). 궁핍과 절망을 딛고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빛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 천재화가. 하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이중섭 연구서 한 권 없었다고 한다면 모두 놀랄 것이다. 논문은 있었지만 단행본은 없었다. 시인 고은이 쓴 ‘화가 이중섭’이 있지만 그건 전기일 뿐이다. 이 대목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 이중섭의 작품 분석에 기초한 본격 연구서라는 점. 저자는 미술평론가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
“이중섭 생애의 전설이 아직도 우리를 가로 막고 있다. 드라마틱한 생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예술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작품에 최대한 밀착해 이중섭 미술의 소재와 주제, 예술적 특징, 그리고 그 변모 과정을 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예술과 삶의 관계를 고찰한다.
우선 그림의 소재.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다. 굵고 힘찬 터치에서 날카로운 선묘(線描)에 이르기까지, 소의 격렬한 동세(動勢)를 단숨에 파악해 들어간 이중섭의 소 그림들. 그것은 소의 생태, 소의 해부학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관념이 아니라 예리한 관찰의 결과다. 돌진하는 소의 모습과 비극적인 내면을 담고 있는 소의 표정을 읽어나가면서 소 그림은 이중섭의 자화상이자 동시에 민족의 자화상이라고 분석한다.소 못지 않게 중요한 소재는 아이들. 아이들은 물고기와 게와 꽃과 어울려 장난기 가득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아이들 물고기 게 꽃이 하나가 된 그림을 통해 자유와 낭만, 공존(共存)에 대한 이중섭의 열망과 범신론적인 사상을 발견한다. 저자는 이제 이중섭 그림의 예술적 특징으로 나아간다. 그 대표적 특징은 선묘와 해학성.
이중섭에겐 색보다 선이 중요했다. 그가 구사한 선은 정확하고 힘차며 유연하고 경쾌하다. 생명력이 넘친다. 즐겨 사용한 베니어판, 마분지, 담뱃갑 은지 등은 선묘에 어울리는 재질이었다. 그 선묘는 아이들을 그린 은지화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담뱃갑 은지는 그 접힌 선이 그림 선과 엉키면서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해학성은 주로 아이들 그림에서 나타난다. 궁핍과 비극으로 점철된 그의 삶이었지만 이들 그림에선 어떠한 우울함도 발견되지 않는다. 건강한 해학이 있기 때문이다.
“해학은 이중섭의 낭만적인 기질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 물고기 새 소 꽃 등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상들을 만나게 하고 그같은 의외의 설정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가져온다. 그게 해학이다.”
저자는 또 이중섭의 민예적 취미에서 해학성의 뿌리를 찾기도 한다. 이중섭이 고려청자에 그려진 아이의 표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가 추론한다. 작품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이중섭 미술의 전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 이중섭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때, 그의 삶도 진정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논의가 전체적으로 정석적이어서 이중섭 미술의 극적인 면모와 입체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237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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