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이순원지음/생각의나무 펴냄▼
이순원(43)의 연작 장편 ‘순수’ 의 책장 위에는 눈이 내린다.
강릉 인근 한적한 시골마을에, 휴전선 인근 군부대 마을의 여관 창가에, 서울의 차디찬 보도 위에 눈이 쌓인다. 어느 창에선가 옅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불빛 사이로 해쓱한 얼굴들이 드러난다. 눈발처럼 소리도 없이, 소녀 티를 채 벗지 못한 여인들이 눈물을 떨어뜨린다.
“눈과 램프와 여자가 있는 풍경을 통해, 시대마다의 성(性)의 사회사를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이땅에 여자로 태어난 우리 누이들의 아픔과 슬픔만 더하게 한 것은 아닌지….”
작품은 1968년부터 98년까지 10년씩을 거슬러 내려오는 낱낱의 단편으로 묶인다. 68년. 이웃의 혼삿날. 소년 은수는 근처 사탕공장의 젊은 여공이 마을 청년들의 노리개가 되는 현장과 마주친다. 은수가 뭉쳐준 눈으로 아랫도리의 피를 닦아내는 여자. 그 선연한 붉은빛은 소년의 머리에 한 점 강렬한 빛으로 남는다.
78년. 대학 재학중 강제징집된 은수에게 ‘애인’이 찾아온다. 찾아온 사람은 고향마을의 이웃집 기숙. 일본인의 후처가 되어 낯선 세계로 들어가기 전, 용기를 내기 위해 그를 찾았다고 말한다. 기운내라고 한번만 안아준다면, 중학교에 가지 못한 서러움에 마른 땅을 찍으며 눈물짓던 옛날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10년 뒤 은수는 작가가 되고 남편을 여읜 채 돌아온 기숙은 술집 ‘로코코’의 사장이 된다. 다시 세월이 흘러 98년. 기숙의 가게에서 안면이 있던 어린 여자가 은수를 찾아온다. 그는 40년전 고향에서 있었던 윤간사건 주동자의 딸. 아버지의 업보를 잇듯, 그 또한 여러 남자에게 폭행당한 쓰린 기억을 안고 있다.
‘그대 정동진에 가면’ 등 작가의 최근 작품에서 짙게 드러나는,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의 시선은 이 작품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발언을 입어 힘을 얻는다. 40년전 잔칫날 동네 사내들이 혼사 주인공을 화제로 함부로 내뱉는 음담은 우리의 연약한 ‘누이들’에게 가해지는 아픔이 사회적 폭력의식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음란상에 우리 사회를 빗대는 발언에서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로 대표되는 초기작에서의 맹렬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나온다.
“작가 생활 초기에 추구했던 사회성과, 그 이후에 추구했던 서정성을 함께 획득해나갈 방법을 이 책에서 모색해보려 했다. 어느 작품에서나 추구해왔던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만은 ‘순수’의 이름으로 온전히 전달되었으면….” 생각의 나무 펴냄.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