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게리 실링/모색)
얼마 전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소집한 미국 경제지도자들의 회합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 자리에서 미 연방준비기금(FRB)의 그린스펀의장은 미국 및 세계경제 전망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면서 지나친 경기과열과 인플레에 우려를 나타냈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MS) 창립자인 빌 게이츠는 신경제에 대한 변함없는 낙관주의를 견지했다. 그린스펀이 현실주의를 대표한다면 MS 등 정보통신산업의 대표주자들은 꿈(미래에 대한 기대)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클린턴은 신중한 낙관주의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학문적 권위를 가진 폴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은 미 증시의 폭락과 경기의 경착륙(hard landing) 가능성을 여전히 경고하고 있다.
본래 경제현상이란 과거 경험과 현재 상황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 보다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딱 부러지게 어떤 입장이 올바르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단지 현실적으로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지나친 기대는 반드시 깨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떤 경제학자도 동의한다.
이 책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들 때문에 세계경제는 향후 불가항력적으로 디플레이션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세계경제가 급격히 붕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꿈을 현실에 접근시키고 미리 대비하지 않는 개인들에게는 경제적 파산과 환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는 것이다. 30년대의 대공황 이후 인플레이션이나 약한 경기후퇴밖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오늘날 투자자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임에 틀림없다.
물론 약 10년간 디플레이션과 ‘유동성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본경제를 보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클 지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경제의 현재는 세계경제가 향후 10수년 동안 경험하게될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다양한 공급과 수요의 거시적 결정요인을 검토하면서, 공급은 증대하지만 수요는 감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디플레이션 경향이 발생한다고 진단한다. 가령 냉전 종식에 따른 방위비 삭감, 정부 재정지출과 적자축소 경향, 은퇴인구의 증가에 따른 소득 감소, 저축 증대 및 이에 따른 구매력 감소, 인터넷 정보의 확산, 경제자유화 경향 등에 따른 경쟁격화와 물가하락 압력 등은 수요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한편 구조조정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고 글로벌 아웃소싱은 비용을 절감시킨다. 이들 요인이 반대경향을 낳는 다른 요인들보다 우세하다면 확실히 세계경제는 디플레이션의 문턱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한다고 할 때 모든 물가가 균등하게 상승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물가 상승은 불균등하기 때문에 보다 많이 상승하는 재화나 자산을 가진 사람이 이익을 보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디플레이션도 물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가격이 보다 덜 하락하는 재화나 자산을 가진 사람이 이익을 보거나 피해를 적게 입는다. 저자는 투자가와 기업에게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전략을 상세히 설명한다.
저자의 모든 주장이 맞는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며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논의에 신뢰성을 더하려면 그 사안의 중대성만큼이나 보다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적 엄밀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대중을 위한 일화적 사건중심으로 서술돼 있어 아쉬움을 준다. 말하자면 불황 경제학의 대가인 케인스에 이은 제2의 케인스를 기대했지만 결국 투자분석가의 매뉴얼을 넘어서지는 못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심각한 질문은 “과연 미국경제와 세계경제가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필자는 가볍게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실제로 세계 금융시장의 연계 증대, 주식과 파생상품의 과다한 성장 등을 볼 때, 불이 난 극장에서 좁은 비상구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과연 질서정연하게 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만큼이나 세계경제의 연착륙 가능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어쨌든 이런 흥미 있는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박순양·이강옥 옮김 295쪽 1만원.
조 원 희(국민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