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55년 9월 13일 밤 모스크바의 국립 볼쇼이극장 로열 박스에 서독 총리 아데나워와 소련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교전국이었던 서독과 소련 사이에 국교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아데나워를 흐루시초프가 초청했던 것이다. 공연된 발레는 소련의 대표적 작곡가 프로코피예프가 1935년에 완성한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원작은 물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로미오라는 소년과 줄리엣이라는 소녀가 서로 깊이 사랑했으나 로미오의 몬터규 집안과 줄리엣의 카풀렛 집안 사이가 지독한 숙적이어서 결국 죽고 마는 비극을 다룬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마지막에 가서 화해의 대단원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아들 딸의 죽음을 보고 나서 두 집안은 지난날 원한을 청산하고 용서와 화합의 손을 잡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으로 막이 내렸을 때, 흐루시초프는 아데나워에게 “보십시오. 과거는 과거로 돌립시다. 이제 화해의 시대가 개막됐습니다”라고 선언했고, 아데나워 역시 화해의 메시지로 화답했다.
▼"과거는 과거로 돌립시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돼 4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려 166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사이의 역사적 대결구도 아래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시체를 딛고 서서 종전 10년 만에 두 나라는 화해를 다짐했던 것이다.
두 달뒤인 6월25일에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이한다. 37개월 동안 계속됐던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남북을 합친 우리 민족의 인적 손실은 무려 520만명 규모에 이른다. 그때 남북 인구를 모두 합쳐 약 3000만명으로 추산한다면 인구 6명에 1명꼴로 손실된 셈이다. 참으로 엄청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는데, 특히 비전투요원의 인적 손실이 세계전쟁의 역사에서 유례 없을 만큼 컸다는 점에 한국전쟁의 비참성이 있다.
인적 손실과 함께 기억돼야 할 점은 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말해지는 이산가족의 발생이다. 부모형제와 친척친지들이 남과 북으로 나뉜 채,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생사조차 모르며 살다가 감아지지 않는 눈을 감은 이들이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인터넷 시대의 개막으로 전 세계가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망 속에 연결된 정보혁명의 21세기에 엽서 한 장, 전화 한 통 주고받을 수 없어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죄없는 사람들이었다. 국제적 냉전과 민족내부적 이데올로기 대결이 빚어낸 비극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남과 북은 그 전쟁이 휴전으로 봉합된 때로부터 47년 가까이 지나도록 화해의 길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군사대결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전 세계가 탈이데올로기 탈냉전과 교류협력의 새로운 역사 단계로 들어선 때로부터 10년이 지나도록 한반도는 부끄럽게도 냉전의 마지막 섬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의 달에 한반도 분단 55년의 역사에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다. 이제는 민족적 차원에서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유산을 청산하는 가운데 평화와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고 할 때, 마치 몬터규 집안과 카풀렛 집안이 뒤늦게나마 원한을 씻고 화해의 악수를 나눴듯이, 남과 북 역시 역사적 정상회담을 시발로 ‘한국전쟁을 뛰어넘어’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야 할 것이다.
▼남북 모두 양보하고 인내하길▼
마침 오늘 판문점에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접촉이 시작된다. 앞으로 우여곡절이 적지 않을 터인데, 남과 북 모두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말고 판을 크게 읽으며 상호 양보와 인내로써 진전시켜가기 바란다. 무엇보다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지고, 그들 말고도 분단과 전쟁의 희생자가 되어 자신의 의사에 반해남과 북에 주저앉게 된 채 귀향을 학수고대하는 동포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올해가 독일통일 10주년의 해임을 상기할 때 남과 북은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부는 국민적 합의를 넓히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레 열리는 여야 영수회담이 좋은 합의를 이뤄내기를 기대한다.
김학준 h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