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을 둘러싸고 정부와 재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 4·13총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부가 재벌의 2단계개혁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자 재계는 나름대로의 경제논리를 내세워 정부에 지나친 간섭을 자제해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금융과 공공부문의 개혁은 그대로 놔두고 왜 기업만 몰아치느냐는 불만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정부와 재계의 이같은 갈등은 ‘뚜렷한 쟁점없는 기싸움’양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정부는 경제개혁의 핵심과제인 재벌개혁이 기득권 수호에 급급한 재계의 도전에 밀리면 더 이상의 개혁은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이고 재계는 재계대로 정부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강도높은 재벌개혁정책이 계속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그도 그럴 것이 총선후 정부의 재벌 개혁압박은 가위 전방위적이다. 먼저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의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나섰는가 하면 국세청은 4대재벌 주요계열사의 대주주 주식이동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도 재벌그룹 구조조정본부 해체, 기업지배구조개선을 통한 총수의 황제경영 탈피를 주장하며 재벌개혁을 거들고 나섰다.
재벌개혁이 우리경제의 체질개선을 위해 필수불가결의 과제인 만큼 정부의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히려 선거 등의 이유 때문에 재벌개혁이 지연되었다면 이제라도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정부와 재계의 갈등구조가 심화된다면 기업활동과 국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과 부작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재벌의 각성이 뒤따라야 하고 재벌 스스로 개혁작업에 나서야 한다.
지난 2년간의 개혁 노력으로 기업의 재무구조개선과 선단식 경영에서의 탈피 등은 어느정도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재벌은 총수 1인 지배체제하에서 오너의 독단경영이 자행되고 변칙적인 부의 세습 등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은 워크아웃 기업에서조차 기업주의 내몫챙기기가 성행한다. 재벌개혁의 완성을 위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상호출자금지, 결합재무제표 작성, 외부감사제 도입 등을 통한 경영의 투명성 확보는 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부도 재벌개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 기업구조조정의 원칙이 이미 세워져 있고 그에 따른 법과 제도도 마련되어 있는 만큼 이에 따르는 것이 순리다. 이와 함께 30대기업지정제도 축소나 구조조정본부의 건전한 운영 등 재계의 건의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재벌개혁이 언제까지 관주도일 수는 없으며 그것은 결국 시장에 맡겨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