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 연기자들에게 하이틴도 아닌 로우 틴(Low Teen)을 타깃으로 하는 우리 드라마 제작 환경은 그야말로 '잔인'하다. 경륜에 맞는 대우는 커녕, 젊은 시절의 이미지를 발산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박근형 한진희 노주현 등 극소수만이 그런 행운을 누릴 뿐이다. 때문에 대개는 코믹 연기로 기약없는 '업종 전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부터 출연 중인 SBS '순풍 산부인과'에서 어깨 힘을 완전히 빼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는 탤런트 박영규(46)는 중년 남성 연기자들에게 새로운 틈새 모델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다. 1m78의 훤칠한 키에 지금도 더블 버튼 정장을 즐겨 입는 그는 한때 남성정장 광고 모델로도 활약했다. 출연작도 대개 SBS '아름다운 죄'등 멜로드라마가 주였다.
그런 그가 22일 첫방송된 SBS 50부작 주말드라마 '덕이'(토일 밤8·50)에서 또 한 번 어깨에 힘을 빼며 중흥기를 이어갈 태세다. 극 중 주색잡기에만 혈안이 된 방앗간 집 외아들로 조강지처 순례(고두심 분)를 버리고 야반도주, 딸 벌되는 양숙희(이자영)와 눈이 맞아 춤 선생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정한구 역이다. 1980년대 중반 최주봉이 맡았던 쿠웨이트 박 의 2000년대 판쯤 될까. 박영규는 배역 소화를 위해 헤어스타일까지 바꿨다. 앞머리를 뒤로 넘겨 스프레이로 고정시키던 평소 헤어스타일에서 벗어나, 머리 앞부분이 그을린 듯한 가발을 쓰고 앞으로 6개월 동안 드라마에 출연할 예정인 것.
- '순풍…'으로 웬만큼 인지도를 회복했으니, 이제는 중후한 멜로드라마가 다시 욕심날만 할텐데.
"그렇지 않다. '순풍…'에 이어 '덕이'에서의 캐릭터는 내 인생의 축소판 같은 거다. 멜로드라마에서 맡은 번지르르한 도시 부르조아는 오히려 어두웠던 내 젊은 날을 극복하기 위한 발버둥같은 거였다."
-중년 남성 연기자 중 당신만큼 180도 이미지를 바꾼 사람은 없다.
"내가 그만큼 독해서일 것이다. '순풍…'출연 제의를 받으며 나는 그동안 고집했던 올백 헤어스타일을 버리고, 가운데 가리마를 휜히 드러내며 머리카락을 좌우로 내려버렸다. 그 순간 연기자로서 이전의 나를 버렸다. '순풍…'에서 다섯 살짜리 딸인 미달이와 먹을 것을 놓고 아옹다옹 다투는 '푼수 연기'는 그렇게 나왔다. "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
"연기는 '레미콘'같은 거다. 끊임없이 쉬지 않아야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온다. 한동안 일이 없을 때도 나는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소재를 발견하며 머리를 굴렸다. 쉬면 딱딱하고 부자연스런 연기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생활 밑바닥에서 뽑아내는 코믹 연기는 어디서 나오나?
"1980년대초 오태석 선생이 이끄는 극단 '목화'에 들어가 그 분과 같이 호흡했던 게 비결인 것 같다. '태' '출세기' '한만선'등에 출연하면서, 그분의 독특한 한국적 해학미를 자연스레 익혔다.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1989년에 '카멜레온'등으로 가수 활동도 했다는데, 요즘도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박영규 독점 출연'을 알리는 성인 나이트클럽의 포스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누구는 절대 밤일 (방송가에서 야간업소 출연을 일컫는 말) 안한다고 하던데, 나는 경제적으로 도움받고 맘대로 노래도 부를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덕이'에서 춤꾼으로 나오면 노래말고 춤도 추라고 할텐데…. 사람들이 원하면 해야지, 하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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