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나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리투아니아에 갔었다. 6년 전에 나의 영문시집 시계들의 푸른 명상 을 미국에서 출판해준 바 있는 미국인 시인 케리 키이즈가 수차례 간곡한 편지를 보내어 꼭 한번 리투아니아에 놀러오라고 해오던 터였고, 때마침 유럽에 갈 일이 있었던 나로서는 그의 초대를 외면하고 그냥 돌아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3년 전부터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대학에 초청교수로 가 있는 터였다.
겨울 리투아니아는 눈에 덮여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냉습한 공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쿨룩쿨룩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북국이 다 그렇겠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자연 조건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케리는 빌뉴스 시내에 제법 괜찮은 집까지 마련하여 혼자 살고 있었다.
나는 좀 근심스런 표정과 목소리가 되어 물었다. 이 나라에 아주 살 것도 아닌데 집은 왜 샀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나라에 아주 눌러 살 생각이라고. 그리고 덧붙여 미국에 남아 있는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 정착할 생각을 하다니, 나는 그의 그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 더 이상 캐묻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일주일을 보내면서 나는 그의 결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케리는 나의 도착을 자신의 리투아니아 친구들에게 사방에 알렸다. 덕분에 나는 도착하던 첫날부터 사방에 불리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술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들과 만나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았던 것 중 하나는 그동안 케리가 나의 영시집을 빌뉴스대학 영문과에서 교재로 택해 가르쳤기 때문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
첫날 저녁에 나를 초대했던 사람은 리투아니아 최고의 시인이며 현직 교육부 장관인 코르넬리우스 플라텔리스였다. 불과 20평 남짓한 검소하기 짝이 없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소탈한 남자가 한 나라 현직 장관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옷로비 사건으로 1년 내내 온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말이다. 코르넬리우스의 아내는 간단한 술상을 장만했고 우리는 웃고 떠들며 문학을 이야기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집주인과 우리는 저마다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한 잔 더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들어선 술집은 대학 근처에 위치해 있어서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데였다. 현직 교육부 장관이 들어섰지만 술을 마시고 있던 학생들 중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학생들 중 몇몇은 우리 자리로 와 악수를 나누며 가벼운 농담을 건네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그저 눈인사만 건네기도 했다. 개중에 몇몇은 아예 우리 자리로 옮겨와 함께 마시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에 머무는 동안 내가 만난 케리의 친구들는 참 많다. 개중에는 세계적인 재즈 음악가 블라디미르 테라소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한결같이 소박했고 소탈했다. 누구 한사람 권위가 있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누구 한사람 단정한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누구 한 사람 증권이나 부동산 시세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그 사람들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사는 우리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리투아니아를 떠나오면서 나는, 지금 우리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물적 환경보다 인적 환경이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내가 케리처럼 리투아니아 같은 나라로 가 정착할 용기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벌써부터 나는 리투아니아에서 만난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하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