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직접 쓰는 가수 신승훈은 노랫말을 쓸 때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슬픈 내용의 비디오를 빌려 본다고 한다. 자기 경험 아닌 다른 상황이 주는 슬픈 감정 속에 몰입해 슬픈 노랫말을 귀하게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히트곡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네가 있을 뿐’이라는 노래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곡의 상황은 ‘나는 살아 있고 너는 죽어버린 뒤’다. 슬픔의 끝인 상황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주는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있겠는가.
조성모의 노래 ‘To Heaven’은 애인에게 귀여운 표정으로 안부를 묻는 노래처럼 느껴지나, 노랫말을 다 들어보면 상대가 죽었다. 그의 노래 ‘슬픈 영혼식’ 또한 그렇다. 김돈규의 노래 ‘나만의 슬픔’은 아예 ‘그녀가 가는 곳에 내 재를 뿌려 달라’고 노래하고 있어, 본인이 죽은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애인을 두고 부르는 사랑노래다.
이 노래들은 사랑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없는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왜들 이럴까. 미래가 없는 한계상황을 요즘의 젊은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리움 정도야 이메일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시시한 감정 정도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통신이 닿지 않는 상황만이 간절함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에릭 클랩튼이 사고로 죽은 아들을 그린 노래 ‘Tears in Heaven’이야 본인의 실제 경우를 노래로 읊은 것이어서, 크게 공감을 얻고 유행도 했다.
어쨌든 죽음을 매개로 사랑을 노래하는 가요가 널리 불려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슬픔에도 건강한 슬픔이 있다. 우리의 가요에서 상대방이나 본인의 죽음을 노래하는 유행이 그만 지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