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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오,수정'…군내나는 일상

입력 | 2000-04-27 19:11:00


올해 첫걸음을 떼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선택은 탁월했다. 28일 시작되는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흑백영화 ‘오, 수정’은 단 두 편의 영화로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아온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 정점에 오른 작품이다.

군내나는 일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묘사하는 세필화법과 우연과 반복을 통해 이야기를 직조하는 솜씨는 더 정교해진 반면, 보는 이를 괴롭게 하던 섬뜩한 냉소는 많이 누그러졌다.

‘오, 수정’은 사소한 이야기다. 한 여자를 정복하고 싶어 애가 타는 두 남자, 팽팽한 성적 긴장이 감돌던 두 남녀가 섹스에 이르는 과정을 소재로 삼았다. TV구성작가 수정(이은주 분)은 PD인 영수(문성근)와 가깝다. 그러나 영수의 후배이자 부잣집 아들인 재훈(정보석)도 수정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별 것 아닌 이 이야기가 재훈과 수정의 입장에서 각각 변주되는 과정을 통해 기억과 진실에 대한 풍부한 함의를 지닌, 결이 세밀한 영화로 재구성된다.

기억만큼 왜곡되기 쉬운 것도 없다. 예컨대 수정과 재훈은 술집에서 재훈이 아줌마를 부른 게 젓가락 때문인지 휴지 때문인지에 대한 기억조차 서로 다르다. 재훈의 기억에서 자신은 구질구질하고 수정을 정복할 기회만을 엿보는 남자지만, 수정의 기억에서 재훈은 근사해 보인다. 모두 5부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재훈이 ‘어쩌면 우연’(2부의 제목)이라고 생각한 수정과의 만남이, 4부의 제목 ‘어쩌면 의도’처럼 사실은 수정의 의도적인 접근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홍감독은 이를 통해, ‘정해져 있는 진실이란 없다. 각자가 바라보는 게 진실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오, 수정’ 역시 홍감독의 전작처럼 드라마틱한 스토리보다는 상황과 감정의 표현이 먼저 다가오는 영화다. 무의미한 대사, 되풀이되는 사건과 행동들은 주기적으로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보통사람들의 위선을 한올 한올 풀어헤치는 날선 관찰도 여전하다. 그러나 수정이 재훈의 기대와는 다른 여자라는 것을 묘사할 때 근친상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은 좀 튀는 대목으로 보인다. 세 배우의 연기가 모두 좋다. 28일 저녁7시 전주 전북대 문화관에서 상영되며 5월27일 개봉될 예정.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