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혁명 / 빌헬름 라이히 지음 / 새길
빌헬름 라이히(1897∼1957)는 1920∼30년대 유럽에서 정신분석이론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비판론을 토대로 성 혁명의 필연성을 역설하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서구에서 학생 운동이 활발했던 1960년대 후반에 재조명돼 인간해방 이념의 이론적 기초로도 각광을 받았다. 1968년 절정에 달했던 학생운동은 비록 정치적 혁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위선적 성도덕의 파괴,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등으로 사회 전반에서 문화 혁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라이히는 최근 푸코, 가타리, 들뢰즈 등의 욕망 이론에도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이 책(원제목 Die sexuelle Revolution)은 본래 1930년 출판됐던 소책자와 1934년 발표했던 두 논문을 모체로 하여 1936년 ‘문화투쟁 속에서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됐었다. 당시는 라이히가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접합시켜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데 몰두하며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를 발간했던 시기였다.
이 책의 ‘제1부 성도덕의 파탄’에서는 성윤리, 성교육, 결혼제도 등 1920년대 자본주의사회 성문화의 병폐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는 풍부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성윤리 및 그에 기반한 온갖 성생활 규제 제도가 신경증을 유발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함을 보여 준다.
특히 충동의 억압과 거부를 통해 인간의 문화가 형성된다고 본 프로이트의 문화철학적 입장에 대해 억압돼 안에 갇힌 충동이 오히려 ‘죽음 본능’이라 할 수 있는 파괴적 충동을 형성한다고 맞선다. 프로이트는 초기의 해방적 입장, 즉 반도덕주의적 입장을 충동거부이론으로써 철회한 셈이며 결국은 ‘인간 해방의 적들과 타협’한 셈이라는 것이다.
‘제2부 소련에서의 새생활 투쟁’에서는 그가 사회주의사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희망과 실망이 교차된다. 그는 1917년 혁명 후 소련에서 결혼 이혼 동성애 출산조절 등에 대해 진보적 법률이 제정되고, 아동발달 청소년범죄 등에 대해 진보적 견해들이 대두되는 것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정신 위생’을 증진시키는 변화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1929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사회주의체제에서도 여전히 성억압적 도덕 관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30년대에 들어 소련에서 일련의 진보적 조치들이 철회되는 것을 보며 1934년 이 부분을 집필한다. 여기서 그는 소련에서 성혁명이 지체되고 반동화된 이유, 그리고 초기의 진보적 법률들을 현실의 변화로 관철시키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했을까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다.
결론적으로 라이히는 “도덕주의적 원리에서 성경제학적 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배부른 사람이 훔치지 않듯이 성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도덕적 규제 없이도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사회적인 충동은 오히려 도덕적 규제의 산물로 나타나는 2차적인 것이며 자연스럽고 건강한 생물학적 충동이 출구를 찾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성격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 책의 출간 후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서구에서는 성에 대한 억압적 규제가 많이 해소됐다. 그러나 케이트 밀렛, 미셸 푸코 등은 성적 억압의 철폐가 곧 인간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개인에게서 성적 삶이 실현돼 가는 바로 그 과정이 ‘권력에 의해 형성’되고 있음을 파헤친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동시적일 수 없을 것 같은 많은 현상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성문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라이히의 성이론은 우리 성문화의 억압적 부분을 분석하고 진정한 인간 해방에서의 성문제를 성찰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미 1993년 ‘성문화와 성교육, 그리고 성혁명’(제문각)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 출판됐었다. 하지만 번역의 대본도 밝히지 않았고 역자의 해설도 별로 없었다. 원본의 주(註)마저 거의 다 빠졌고 저자의 강조 부분도 무시하는 등 불충실한 점도 많았다. 이번에 출간된 윤수종교수(전남대 사회학과)의 완역본은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을 구사하고 역자의 상세한 해설도 첨부했다. 다만 이전 완역본과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윤수종 옮김 376쪽 1만5000원
최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