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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e가족]한국/변화하는 가장들

입력 | 2000-05-01 18:48:00


《5월은 가정의 달. 가정의 소중함이야 누가 모르랴마는 일과 사회, 세상의 물살은 때로 가정의 울타리를 흔들고 있다. 정보화사회로 달려가는 우리나라를 비롯, 우리보다 한발짝 앞서가는 동아시아의 가족들은 어떻게 가정의 가치를 지키고 있을까. 한국과 싱가포르, 홍콩, 대만, 일본의 가정을 살펴본다. 》

당신이 오늘 ‘시한부 인생’선고를 받는다면?

벤처기업 ㈜키즈넷 박지성사장(34)은 “가족에게 미안하지만 맨먼저 직원들과 투자자들은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3월1일 새벽 겨드랑이가 뻐근하길래 만져봤더니 멍울이 잡혔어요. 끔찍했지요. 머리맡 노트북을 켜고 ‘사장 유고시 회사운영계획’을 짜기 시작했어요.” (박씨는 다음날 피지선제거 수술을 받았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영남대 이강옥교수(44·국어교육)는 “‘아빠 없는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하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다”고 돌이킨다.(이교수 역시 내시경검사 결과 위암이 아니라 위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 사회, 가족의 무게를 한몸에 지고 있는 오늘의 가장들. 그들에게 가정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가장 24시〓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3월말 방한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가정과 직장이 분리됐으나 제3의 물결(정보혁명)과 함께 가정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하원규박사(사회정보학)도 “재택근무와 인터넷쇼핑이 늘어나면서 직장과 가정의 융합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귀가 채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침 7시 출근, 밤12시 퇴근에 일주일에 하루는 새벽 서너시까지 계속되는 회의 때문에 여관신세를 져요. 일요일엔 피곤하니까 시체가 돼버리고….”

박지성사장은 “회사가 하루하루 커나가는 걸 보면 일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며 “이 과정에서 가족은 희생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봄 창립한 ㈜키즈넷의 시가총액은 340억(CEO 지분율 50%), 사장연봉은 7000만원.

최근 국제노동기구(ILO)의 통계연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주당 50시간(1999년 기준)으로 ILO회원국 75개국 중 7번째로 길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가장 긴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선진국들의 노동시간은 주당 40시간 미만. ‘근대화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산업사회에서나, 1등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정보화사회에서나 우리나라 가장들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만큼 뒷전일 수 밖에 없다.

▽가족은 해체되는가〓경희대 유영주교수(가족학)는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개별화로 치닫다보면 가족은 해체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체화 못지 않게 반개체화(sense of membership)를 원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적 욕구 때문에라도 가족은 해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디지털문명의 도래로 곧 여성과 남성의 역할, 직장과 가정의 경계는 무너지고 전자개인주의로 무장한 가족구성원들이 전자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원규박사는 내다보았다. 이제부터 여기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과 제도,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난 집으로 간다〓서진석씨(35·나우누리 마케팅팀장)는 벤처기업에 근무하지만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6시반 퇴근한다. 5년전 입사 당시만 해도 벤처기업의 초창기 분위기 속에서 정열을 갖고 야근을 밥먹듯 했다. 지금은 가족과의 시간을 고액연봉과 맞바꾸자는 제의가 들어오지만 거절하고 있다.

“아이들과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의 삶을 유보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깨달음.

아내를 유학보내고 젖먹이 아들을 2년동안 키운 이강옥교수는 지난해 육아일기를 영남대 홈페이지에 연재해 호응을 얻었다.

“남성중심주의가 뿌리깊은 영남권에서도 육아에 대한 생각이 변하고 있다. 아내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부모로서 참여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육아를 도맡은 나를 주위에서 백안시하기는커녕 부러워 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말이다.

키즈넷 박지성사장 조차 “밖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이해받을 수 있는 곳이 가정”이라며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의 질로써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이같은 변화는 세상흐름에 민감한 광고계에도 감지됐다. 최근 뜨고 있는 LG패션 신사복 CF. 출장에서 돌아오는 기차안이 배경이다. 지친 모습으로 ‘왜 살지’하고 되뇌이는 가장. 한 여자아이가 옆좌석의 곰인형을 가리키며 “아저씨. 누구 꺼예요?” 묻자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미소짓는다. “그래, 난 집으로 간다.”

kjk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