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포착과 선택이 정치의 마술이라고 한다. 결정적 시기에 똑 부러진 선택을 해야 정치게임의 승자가 된다는 얘기다. 기회는 한두 번뿐이고 선택의 순간과 방향을 바르게 잡기도 쉽지 않다. 냉정한 판단력과 순발력 돌파력이 있어야 정치적 승부사가 될 자격이 있다. 이른바 3김씨, 김대중대통령(DJ) 김영삼전대통령(YS) 김종필자민련명예총재(JP)는 그런 기회포착과 선택의 명수였다. 정치9단 소리를 듣는 것은 그 때문이다.
4·13총선에서 제1당 확보에 실패한 DJ가 발빠르게 한나라당 이회창총재와 영수회담을 갖고 ‘상생의 정치’에 합의한 것도 일종의 기회포착이고 선택이다. 영수회담에 이어 자민련 이한동총재와 소수당 대표까지 일일이 만나 협조를 당부한 것도 만약에 대비해 선택의 폭을 넓히려는 포석이다. 어쨌든 이런 연쇄회담 이후 국민은 모처럼 여야가 협력하는 정치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DJ로서는 일단 총선후 정국에 대한 국민 불안과 정쟁의 빌미를 잠재워놓고 6월의 남북정상회담에 임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4·13총선결과를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치부할 수 없다는 평가를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DJ의 그런 선택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정치권의 어느 쪽도 지지 않고 말 그대로 함께 사는 정치를 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다. 집권측이건 야당이건 줄건 주고 받을건 받았다는 기분이니 그들대로 좋고 국민도 모처럼 싸우지 않고 민생을 돌보는 정치를 한다니 손가락질할 이유가 없다. 한마디로 윈윈(Win Win)게임이다.
그런데 이런 판을 곱지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YS와 JP다. 지금의 판세가 그들은 매우 못마땅한 것 같다. 우선 YS를 보자. 총선후 미국에 간 그는 입만 열면 한국정치에 대한 비난이다. “김대중이는 독재자고 거짓말쟁이”란 말은 전부터 해왔지만 그를 ‘항복’시키지 못하는 야당도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못된 정권을 심판하려면 야당이 총선에서 3분의2 의석을 얻어야 했는데 공천파동으로 그러지 못했다”며 “이회창총재는 책임지라”고 외친다. 방미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정권과 싸우는 방법으로 ‘등원거부’를 시사했다. ‘상생’보다 ‘대결’을 주문한 것이다. 그게 먹혀들지 않아선지 차기 대선에서는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는 솔직히 아직 모른다. 다만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이 총선때 “다같이 영도다리에서 빠져죽자”고 섬뜩한 소리를 하며 “우리 뒤엔 YS가 있다”고 외쳤으나 참패했으니 별것 아닐 거란 생각이 들긴 한다. YS가 한나라당 공천파동 때문에 정권심판이 안됐다고 분해 하는 걸 보니 민국당을 내심 지지한 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당은 선거에서 영락했다. 그로 미루어 YS가 지지하면 당선가능성이 높은 대선후보가 오히려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JP는 제살길을 위해 판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총선후 그의 행보는 ‘갈 지(之)자’다. 교섭단체조차 구성할 수 없는 17개 의석을 얻는데 그치자 “국민이 의식했건 안했건 자민련에 임무를 부여한 것”이라는 묘한 논리를 개발해냈다. 그러면서 “DJ가 나를 짓밟으려 했다”고 투정하며 ‘살기 위해’ 무슨 수든 쓰겠다고 어른다. 여야 어느 쪽과도 ‘동거’할 수 있다는 제스처로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나 국회의장직 등 떡도 챙길 태세다. 자신을 제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협력은 못봐준다는 으름장으로 ‘17석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이다.
정치9단들의 생각을 보통사람이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DJ가 여전히 YS와 JP에게 만나자는 손짓을 하고 또 그렇게 되고 있으니 그들 생각을 더욱 알기 어렵다. 그러나 보통사람들도 민심이 무언지는 분명히 안다. 그건 “YS는 그만 나서라”이고 “JP는 이제 끝났다”일 것이다.
DJ의 임기가 끝나면 공도 많고 탈도 많은 3김정치도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도 YS와 JP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혹시 ‘신3김시대’를 바라는 것일까. 그렇게도 명예퇴장할 기회를 못잡고 선택이 두려운 것일까.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