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지수 그래프 ‘∼’
올라가면 환호하고 내려가면 한숨쉰다. 주가지수그래프에 매달린 꼭두각시다. 그러나 올라가면 언젠가 내려오고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자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道)의 움직임(反者道之動)”이라 했다.
물론 올라가는 일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그런 법은 없다. 아둔한 인간들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 올라가기만을 바라지만 현명한 철인들은 그런 무모한 욕심 대신 차라리 변치 않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항상 높은 곳에 있으려는 것은 ‘욕심’이지만 높고 낮은 변동 이면의 영원함을 추구하는 것은 ‘진리 탐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년간 철인들이 매달려 왔던 본체나 실체의 탐구는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대신 “만물은 흐른다”며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 파악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이 각광을 받는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실체를 추구하기보다는 보이는 현상의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법칙성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뿐 아니라 인생사의 법칙까지 찾아내려 했던 ‘주역(周易)’은 변화 이면에서 변화의 법칙을 읽어내려 했던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오랜 것인지를 알려 준다.
물질이든 사회든 변하지 않으면 썩는다고 경고하며 변화에 적극 대응할 것을 주장했던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이나, 변화의 법칙인 변증법을 체계화한 독일철학자 헤겔은 모두 변화의 지혜를 계승해 번영의 근대사를 준비한 현자들이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변화란 좋음과 나쁨의 교차다.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것은 단순무식한 이분법이지만 좋음 속에서 나쁨의 조짐을 읽어내며 준비하고 나쁨 속에서 좋음의 조짐을 읽어내며 인내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몫이다. 하나하나의 좋음과 나쁨을 미리 알아내려는 욕심은 조그만 이득을 선점하려는 ‘점(占)’이지만 그 ‘추세’를 읽어내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현자의 넓은 안목이다.
국가의 흥망이든 경기의 변동이든 그 조짐과 추세는 미리 감지되기 마련이다. 좋고 나쁨의 이분법적 교체는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보화와 세계화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주가에 거품이 있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해 왔다. 거품의 크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망정 어느 정도의 거품제거기가 있으리란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거품의 상승곡선에 자신만은 마지막까지 매달릴 수 있으리라는 무모한 꿈을 꾼다. 이것을 지혜의 부족이라 하면 수천년간 인류가 쌓은 역사의 경험이 무색한 일이니 ‘욕심’ 때문이라 해 두자.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새처럼 날아올라 10번이나 두 발을 엇갈려 부딪치며 앙트르샤 로열(entre-chat royal)이라는 신화를 구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가 높이 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약의 공간에서 이미 착지의 순간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착지를 준비하지 않는 도약은 상승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낙하의 망각’일 뿐이다.
한 번의 날아오름에 대한 추억으로 여생의 위안을 삼을 셈이 아니라면 더 높은 곳으로의 도약은 내려옴의 지혜에서 생겨남을 기억할 일이다. 그 지혜를 가리는 것은 욕심이다. 그 부침의 변화 속에서도 ‘나’만은 예외일 수 있으리라는 망상은 바로 ‘나에 대한 집착(我執)’에서 나온다. 자기 욕심에 냉정한 자가 변화의 흐름을 읽는다. 변화를 읽으려면 내 마음에 내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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