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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선/프랑스]신근수/살아있는 학교 "과외 몰라요"

입력 | 2000-05-03 19:36:00


파리에서 한국인 호텔을 경영하다 보니 한해 1000여명의 한국 젊은이들을 만난다. 지난 10여년 동안 배낭여행을 온 한국 대학생들에게 잠자리와 유럽여행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젊은이들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바뀌는 모습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여행이나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 땅을 밟는 젊은이들의 관심사는 다양하다.

▼학문분야 다양 학비 거의 무료▼

“저는 남자지만 미용공부를 하러왔습니다.” “한국에서 으뜸가는 프랑스 요리가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영화 촬영 조명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자동차 정비 공부를 할 계획입니다.”

흔히 프랑스 유학 하면 불문학 패션 미술 등을 떠올리지만 이제는 전공이 상업사진 컴퓨터그래픽 제빵 미술큐레이터 음향 영화감독 연기 음악 지휘 해양학 등으로 무척 다양해졌다. 심지어 외인부대에 지원하는 한국인들도 한 해에 수백명에 이른다. 물론 유학생들의 나이도 과거 20대 중반에서 지금은 10대로 뚝 떨어져 버렸다.

이 새로운 현상은 시대 변화와 함께 프랑스 교육기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립학교는 거의 무료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한달 생활비 1000달러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다. 프랑스는 대학 유학생에게 한달에 150달러의 주택 보조비까지 지원해줘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유학생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 그러나 사립대학은 한국의 사립대 등록금에 버금가는 학비가 들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패기에 넘치는 고국의 젊은이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신바람이 난다. 가끔 당돌하고 조금은 버릇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모습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한다. 늘 인터넷을 끼고 살고 영어나 프랑스어가 서툴러도 외국인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 괴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얼마 전 프랑스에 유학온 지 1년반 된 H군을 만나 볼로뉴 숲을 함께 걸었다. 개선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볼로뉴 숲은 산책로 조깅코스 경마장 센강 야영장 등이 있는 매머드 공원으로 1000만 파리 시민에게는 소중한 삼림욕장이다.

올해 18세인 H군은 장차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비즈니스 분쟁을 해결하는 변호사가 되는 꿈을 갖고 있다. 그는 1년간 어학코스를 거쳐 6개월전부터 고교 2년 과정을 밟고 있다. 곧 프랑스어로 된 수능시험을 치르고 고3 수험생이 된다.

내가 “프랑스와 한국의 교육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더니 통계까지 비교해가며 제법 논리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처음에 “고교 생활이 과연 이럴 수도 있구나”하고 어리둥절했다고 말했다. 학급당 학생수 50명이나 되는 한국의 콩나물 교실에 비해 프랑스는 15명 정도에 불과해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친구 같은 선생님이 늘 곁에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영어 수학에 매달리는 반면 이곳 학생들은 논술 물리 역사를 비중있게 공부하고 특히 철학 과목은 대학교 수준이라며 놀라워했다.

▼"고교생활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한국 고교생은 공부에 쫓겨 하루 5시간밖에 잠을 못자는 바람에 주말은 수면보충으로 때운다. 수면시간이 7, 8시간인 프랑스 고교생은 주말이면 스포츠를 하면서 땀을 흘리거나 친구들과 여가를 보낸다.

한국에서는 과외금지 위헌 결정 이후 공교육이 흔들리고 고액과외가 심해지지 않을까 학부모들이 우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학교 교육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과외를 하지 않으면서도 창의적인 인재들을 길러내는 프랑스 교육을 보면서 한국도 하루빨리 그런 교육 여건이 마련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조기유학 바람이 불면 외화가 유출된다고 국제수지를 걱정하는 애국자들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들은 바로 한국의 귀중한 자산으로 성장한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을 체험하고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H군도 한국에 가서 프랑스에서 외화를 쓴 이상의 몫을 하는 훌륭한 직업인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신근수(파리 물랭호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