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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갤럭시 퀘스트]

입력 | 2000-05-04 19:06:00


대개의 SF어드벤처 영화에서 영웅들이 승리하는 원동력은 불굴의 모험심과 용기, 또는 과학의 힘에 기반한 팀웍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상영 중인 SF영화 ‘갤럭시 퀘스트(Galaxy Quest)’에서 위기에 처한 주인공들을 구해준 영웅은 TV쇼 ‘은하방위대’에 푹 빠져 우주선의 구조와 비상 탈출구의 위치를 줄줄 꿰고 있는 10대 소년들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엉뚱한 데에나 빠져 있는 애들이 우주를 구하다니!

‘갤럭시 퀘스트’는 아주 재미있는 코믹 SF어드벤처 영화이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오타쿠’에게 보내는 찬사가 듬뿍 담겨 있다. 일본에서 비롯돼 이제는 영어권 지역에서도 보통 명사처럼 쓰이는 ‘오타쿠’는 자기 만족적인 마니아 수준을 넘어서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전문 식견까지 갖춘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래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했지만 ‘오타쿠’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일본의 문화상품인 애니메이션의 창조자들로 주목받으면서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갤럭시 퀘스트’에서 10대 소년들 뿐 아니라 TV쇼 ‘은하방위대’를 실제 있었던 일로 착각하고, 거기 나오는 우주선의 작동원리를 연구해 똑같은 구조의 첨단 우주선을 만들어낸 외계인들도 일종의 오타쿠가 아닐까.

이게 다 허구일 뿐이라고? 천만에! 이 외계인들과 10대 소년들은 ‘갤럭시 퀘스트’가 패러디한 영화 ‘스타 트렉(Star Trek)’에 열중하는 현실의 오타쿠들, 속칭 ‘트레키(Trekkie)’와 너무 닮았다. 트레키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 보고서라 할만한 다큐멘터리 ‘트레키스(Trekkies)’를 보면 북미 지역의 트레키들은 확실히 별난 데가 있다.

한 캐나다 사람은 ‘스타 트렉’ 시리즈에 나왔던 희한한 의자를 직접 만들어 타고 다니는가 하면, 어느 치과의사는 자기 병원 내부를 마치 우주선처럼 치장해놓고 기공사들도 우주복을 입고 근무하게 할 정도다.

트레키들은 때로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보인다.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한 여자는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선 장교의 제복을 입고 가서 판사가 나무라자 “대통령이 재판을 받는다 해도 나는 이 제복을 입겠다”고 맞선다.

그러나 이들은 장난이 아니라 심각하고 진지하다. ‘스타 트렉’이 취미를 넘어 생활의 일부가 돼버린 이들은 더없는 정성을 들여 ‘스타 트렉’을 탐구한다.

‘스타 트렉’에 나오는 엔터프라이즈 호와 복잡한 장비들의 구조에 통달한 열네살짜리 소년은, ‘갤럭시 퀘스트’에서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하자 해박한 지식으로 탈출로를 알려주는 10대 소년들과 똑같다. 일본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던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신세기 에반겔리온’으로 세계를 재패했듯이, 트레키들 중 일부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사람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 창조적인 결과물이 없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자기를 넘어서는 초인적인 의지까지는 엄두도 못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늘 두통거리인 ‘나’를 잊고 무엇에든 몰입해보는 경험은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닐는지. 몰입이 강박으로 치달으면 음산한 괴짜 오타쿠가 되던가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스토커가 되겠지만, 관심을 사심없이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삭막한가.

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