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졸(卒)의 정치’를 거부하며 김대중(金大中)총재가 창당한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았고, 곧이어 실시된 15대 총선에서 낙선했던 민주당 김원기(金元基·전북 정읍)고문이 권토중래(捲土重來)에 성공했다.
김고문의 권토중래는 정치권 안팎에서 관심을 끌만한 일로 얘기된다. 지금처럼 여야 간 불신의 골이 깊은 상황에서 그나마 폭넓은 대화가 가능한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지둘러’(‘기다려’의 사투리)라는 별명처럼 느긋함과 신중함이 김고문의 대표적 이미지.그러나 이같은 이미지가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고, 이 신뢰가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김고문이 내세우는 전력(前歷) 중 하나가 13대 국회 여소야대 상황에서 제1야당인 평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일. 당시 남다른 대여(對與)협상력으로 정국을 원만히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게 김고문의 얘기다.
그는 4년 간의 의정공백에 대해 “국회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보다 냉철한 눈으로 정치를 바라볼 수 있었고, 겸손과 인내의 소중함까지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여야를 넘나드는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지금같은 ‘대결적인 정치문화’의 개선에 기여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중이다. 이를 위해 국회의장 경선에 나서는 것도 심각히 고려 중이다.
“우리 국회는 헌정 50년 간, 특히 ‘5·16’ 이후 여야 대결과 극단적 지역주의의 대리 전투장이 됐으며 이같은 정치풍토를 바꾸지 못하면 국가적 불행이 올 것”이라는 게 김고문의 주장이다.
그는 그러나 여권 내의 역학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 따라서 민감한 국회의장 경선문제와 자신의 경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국회의장의 권능이 회복되려면 의원들의 자유경선을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그의 소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 지도부의 의중을 모른 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신 그는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정당생활을 하면서 정치인이 해 볼 수 있는 자리와 역할은 거의 다해 봤다. 이제는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서 정치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모든 것을 걸겠다. 자리에 연연해 구차하게 정치할 생각은 없다.”
‘졸의 정치’를 거부하면서 신고(辛苦)를 겪었던 그가 현실정치의 벽을 넘어 이같은 생각과 구상을 펼쳐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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