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쪽짜리 책 한권에 4만9000원. 출판사 푸른숲이 내주 출간예정으로 막바지 제작중인 ‘시간박물관(원제 The Story of Time)’의 가격이다.
사실 이 정도 책값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97년 시공사가 출간한 ‘고려시대의 불화’는 한권에 40만원이었고 99년 학고재가 펴낸 ‘중국 회화사 3천년’은 10만원이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책 속에 실린 도판 자체가 자료적 가치를 갖는 미술서적. ‘시간박물관’에도 100여장의 사진, 그림 자료가 실리지만 이 책은 명백히 인문서다.
애당초 출판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제작비를 적게들여 책값을 낮추면서 좀 더 많은 독자를 공략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고급스럽게 만들 것인가. 출판사는 그 중 ‘고가(高價) 정책’을 택했다. 그 결정에는 기왕의 경험이 힘을 실었다.
지난해 이 출판사가 낸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부르크하르트의 명저로 꼽히는 이 책을 고급스런 양장본으로 내면서 가격은 2만9000원으로 매겼다.
‘비싼 책이니 안 살 사람은 보지도 말라’는 시위처럼 서점에 내놓는 책을 투명 비닐커버로 밀봉했다. 현재까지 판매부수는 4000여부. 손익분기점인 2300부 판매목표를 거뜬히 넘겼다.
“소프트커버를 택했다면 5000원쯤 책값을 낮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책이 덜 팔렸을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 독자층은 책의 의의를 아는 구매력있는 지식인들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소장하고 싶은 잘 만든 책’이었다.”(푸른숲 김학원주간)
‘시간박물관’은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와 박물관이 공동기획한 시간에 관한 백과사전적 도서. 에른스트 곰브리치, 움베르토 에코 등 당대의 권위자 24명이 필진으로 나섰다.
출판사는 이 책을 보통 출간되는 신국판 크기의 1.8배 정도되는 220×268mm 사이즈의 양장본으로 제작한다. 종이는 미술서적등을 인쇄하는 스노우화이트지. 표지는 특별주문한 천으로 감싼다.
인쇄는 5000부로 한정할 계획이다. 판권이 기재되는 란에 ‘0001’식으로 일련번호도 인쇄한다. 책을 사는 독자에게 ‘당신은 이 책의 몇 권째를 선택한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자는 전략이다.
김학원주간은 “고급 인문서의 독자는 어차피 제한돼 있다”며 “타겟독자층이 원하는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고 그만한 책값을 받는 것이 불황시장에서 인문서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창작과비평사도 최근 발간한 E P 톰슨의 명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양장본으로 2권 1질에 6만원으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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