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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정은지씨/'듀얼 라이프'로 살기

입력 | 2000-05-16 19:11:00


▼에피소드 하나.▼

“아휴, 아줌마. 그만두시려면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죠. 갑자기 못나온다고 하면 전 어떡해요.”(나)

“아 글쎄, 미안해요. 딸이 갑자기 시집을 간다고 저 야단이니 시골에 내려가야지 어쩌겠수?”(파출부)

집안일 돌봐주는 파출부들의 예고없는 통보. 전문직 여성과 두아이의 엄마를 ‘겸직’한 7년 동안 그렇게 아줌마 7명이 떠났다. 그때마다 친정엄마가 달려와야 했다.

수많은 취업주부들이 나처럼 직장과 육아 사이에서 허둥댄다. 친구들이 ‘아줌마’ 때문에 고생할 때 발을 벗고 나서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래서 ‘아줌마 뚜’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혼자 힘으론 부족하다.

갑자기 일이 생겨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하거나 집들이를 할때 여자들끼리 서로 도울 수 있는 ‘네트워크’가 있으면 좋을텐데….

▼에피소드 둘.▼

때 99년 11월말. 장소 불꺼진 침실.

“우리나라에도 아이빌리지(www.ivillage.com)처럼 여성들에게 좋은 정보를 주는 인터넷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다. 왜 없을까.”(나)

“당신이 만들면 되잖아.”(남편)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해? 인터넷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데….”(나)

“인터넷이니까 할 수 있는거지. 불 좀 켜봐. 접속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자.”(남편)

바로 들어가본 아이빌리지. 각 분야의 여성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 등을 컨텐츠로 펼쳐놓아 어려움에 처한 여성에게 ‘솔루션’을 제공하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사이트’. 지금껏 부인암 전문의로 암과 환자 밖에 모르고 살아왔다. 만약 이 정도의 사이트를 만들 수만 있다면….

의사이자 인터넷사업가로서의 ‘듀얼 라이프(Dual Life)’는 이렇게 시작됐다.

올초 두달간, 매일 20여명의 환자를 치료한 뒤 퇴근해 매주 서너명씩 일면식도 없는 여성들을 찾았다. 인터넷 사이트에 좋은 컨텐츠를 올리고 방문자가 남긴 질문에 답해줄 여성 전문가들을 ‘포섭’하기 위해. 게다가 이들은 모두 무료봉사자여야 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전화해 “30분만 시간을 내주세요”라고 하면 그쪽에서도 황당한 일일터. 그러나 한 사람 두사람, 나와 생각이 같은 여성들을 만나며 힘을 얻었다.

그렇게 2개월에 거쳐 변리사 세무사 회계사 메이크업전문가 미술치료사 등 각 분야의 여성전문가 50명을 확보했다. 매주 한 두 번씩 ‘야근’한 끝에 지난달 오픈한 미즈플러스(www.msplus.co.kr)는 5월초 개설 한달도 못돼 야후 라이코스 심마니 등 검색엔진의 ‘금주의 추천사이트’로 떠올랐다.

한 후배의사는 도와달라는 말에 “언니, 또 일을 벌이셨군요, 좀 조용히 살지?”했다. 자신은 일과 집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느냐며. 사실 후배들이나 직원들은 나보고 ‘에너자이저’란다. 왜 삶에 대한 열정이 그칠 줄 모르냐면서.

레지던트 시절의 일이다. 열다섯살이던 내 환자는 치료예약시간이 돼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번 방사선 치료에서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불길한 생각이 스쳐 바로 연락해보니 아이는 지난 밤에 세상을 떴단다.

죽음을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나의 시간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됐다. 환자에게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할 일이 ‘보였다’.

‘세상의 절반’이지만 출발점이 다른 여성들. 그들이 도움을 받고 편안해지는 세상이 되면 ‘절반’이 다시 나머지 ‘절반’을 ‘접변’(接變)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빚까지 져가며 인터넷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나섰을 때 남편을 제외한 누구도 힘이 되지 않았다. ‘하나의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웬 곁가지?’라는 주위의 시선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이나 홍콩에선 1인 직업수가 평균 1이 넘는단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생산성이 높은게 아닐까.

(정은지씨는 지난달 개설한 인터넷사이트 미즈플러스의 실질적 ‘오너’이지만 현재는 사외이사로 활동합니다. 64년생인 그는 연세대의대 신촌세브란스병원의 전임의를 거쳐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의 치료 방사선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중고차를 얻기 전까지는 자동차를 사지 않았던 환경론자이기도 합니다.)

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