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슈킨의 시 ‘예언자’에 나오는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불사르라’는 저 유명한 구절을 대하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생각난다.
그가 홀연히 몸을 일으켜 전 미국을 향해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외치면서 그 꿈을 찬연하게 펼쳐 보이자 영혼이 감전된 듯 떨치고 일어난 미국인들이 그가 제시한 꿈의 실현을 향해 전진해간 과정은, 출애굽기의 장려한 역사적 진동에 비견할 만한 감동을 준다. 마틴 루터 킹이라는 한 개인의 꿈이 미국의 전체 역사를 얼마만큼 강력하게 앞으로 진전시켰던가. 진실로 아름다운 말과 그 말이 지니는 주술적인 힘을 킹 목사의 경우처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흔치 않다.
사람의 영혼은 그가 꿈꾸는 만큼 성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꾸고 있는 꿈이 어떤 형태의 것인가에 따라서 그가 걸어갈 길도 정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 그래서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참되고 아름답고 당당하고 보람된 삶에 대한 꿈이 아닐까?
조선시대에 사신들이 청나라 수도 베이징(北京)을 다녀온 기록인 ‘연행록(燕行錄)’을 읽노라면 문득 기이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 옛날 청나라 황실이 꾸었던 거대한 꿈의 자취가 먹을 대고 그린 듯 오롯이 행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사신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 속이라 해도 청나라 조정의 황족과 고관들이 의전절차나 행사를 위해서 궁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 누가 지배자인 만저우(滿洲)족이고 누가 피지배자인 한족(漢族)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말을 탄 것은 만저우족이고, 가마를 탄 것은 한족이다. 청나라 황실의 규례상, 만저우족은 반드시 가마가 아닌 말로 이동해야 했기에, 지존의 황제일지라도 몸소 말을 타고 달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 전체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인 만저우족으로서, 중원 대륙을 뒤덮은 거대민족인 한족들을 잘 다스려 대제국을 충실하게 경영하고자 하는 거대한 꿈이 청나라 황실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정책이었다. 편리한 가마는 피지배민족인 한족들이 타도록 양보하여 우대하는 뜻을 보이고, 지배자인 만저우족은 비록 황제라 할지라도 말을 타고 다니게 함으로써 최고 권력자로서의 안일과 편리함에 젖지 않고 늘 근신하여 깨어 있는 자세를 견지하게 한 것이다.
청나라 말기에 들어와 황실법도가 무너지고 기강이 흐트러지기 전까지, 역대 황제들이 거의 다 뛰어난 무인인 동시에 빼어난 학자였고 유능한 정치가였던 것도 삼가 그토록 근신하는 통치자로서의 자세를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결과 소수민족인 만저우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가장 오랜 기간 선정(善政)을 베푼 강력한 왕조가 되었던 것이다.
대제국인 청나라 황제들이 몸소 말 등에 올라 말고삐를 쥐고 다닐 때, 우리 조선왕들은 어떻게 했던가. 다리 묶어 놓은 사람들처럼 궁궐 안에서 이 전각에서 저 전각으로 옮길 때도 옥교(玉轎)를 타고 움직이면서 그것을 권위와 권력과 존귀함의 상징으로 알고 만족했다.
이런 현상이 지난 시대 과거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꿈이 없는 다수는 꿈을 지닌 소수에게 끌려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몸이 두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사회 각계각층이 혼탁하고 어지럽고 전망이 불투명하다면, 가장 큰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인 우리가 바르고 반듯하고 큰 꿈을 제대로 지니고 있지 못해서이다.
꿈은 거대한 나침반. 텅빈 사막에서도, 망망 바다 위에서도 바른 길을 찾아낸다. 세찬 기류가 날개 큰 새를 하늘 높이 끌어올리듯, 바른 꿈은 사람을 세상 위로 높이 밀어 올려 넓고 트인 시각으로 천하를 보게 만든다.
이제 우리 눈앞에 다가온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문제 역시 그렇다. 이 문제가 어찌 전개되고 어떻게 진전될지, 그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민족의 대화합에 관해 지닌 꿈의 크기와 그 꿈의 성실함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송우혜(소설가)